물산장려운동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생산한 물품을 사용하여 조선인의 산업을 진흥시키자는 경제적 자립 운동이었다. 토산 애용론이나 산업 진흥론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그것이 대대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1922년 가을이었다. 그즈음 식민지 조선과 일본 사이에 관세가 철폐될 것이란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과 일본 사이에 관세가 철폐되면 가뜩이나 취약한 조선인 산업이 큰 타격을 입을 것은 분명했다.
식민지 조선인 산업에 대한 일제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게 된 이상 자구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은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대별되었다. 형태별로 대중운동, 문화운동, 무장투쟁 등으로 나타났다. 1920년대 초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조류로 부상한 것은 문화운동이었다. 문화운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향상해서 장래에 도래할 신사회의 토대를 건설하자는 운동이었다. 서구 열강의 지지를 통해 독립을 획득하고자 했던 3.1운동이 실패로 귀결되자 민족의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그 논리는 문화운동이란 형태로 발현되었다.
1923년 전반기에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물산장려운동은 문화운동의 최고봉이었다. 조선인 경제계와 민족 운동계는 조선인 산업의 몰락이 민족의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물산 장려, 자급 자작, 소비 절약의 절박성을 강조했다. 1923년 11월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조선인이 총단결하여 절박한 경제문제를 해결하자고 호소했다. 여기에 발맞추어 조선 청년회 연합회는 물산 장려에 관한 표어를 공모하여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한편 물산 장려를 선전하는 순회강연에 나섰다. 이러한 준비 작업을 거쳐 1923년 1월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의 취지는 민족적 위기의식과 자의식을 동시에 자극함으로써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내 살림을 내 것으로 하자는 단순명료한 슬로건 아래 물산장려운동은 들불처럼 순식간에 확산하였다.
물산장려운동에는 여러 정치세력이 동참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 가운데 물산장려운동을 반대한 경우는 대종교 청년회 정도였다. 그 외에는 대부분 물산장려운동을 지지했다. 사회주의 세력 가운데 물산장려운동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은 공산주의 상해파의 일부뿐이었다.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산주의 그룹은 물산장려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물산장려운동에 대한 각 정치 세력의 태도가 달랐고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한 정치세력 역시 다양했기 때문에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논의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한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위기가 성숙하지 않았으므로 문화운동에 의해 민중을 계몽하고 생산력을 향상하면서 사회혁명의 주 객관적 조건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외 다른 공산주의 그룹은 무산계급이 정치혁명을 통해 권력을 획득해야만 사회혁명을 이룰 수 있으므로 문화운동 세력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계급투쟁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무산계급이 권력을 획득해야 신사회에 조응하는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물산 장려를 통한 산업진흥론에 동조할 수 없었다.
물산장려운동은 토산 애용과 산업진흥의 두 측면을 포괄했지만, 후자 곧 조선인의 생산을 증식시킨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토산 애용은 조선인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생산 기반은 매우 취약해서 조선인의 소비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물산장려운동 내부에 토산 애용을 강조하는 경향과 생산 증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함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조선인의 생산을 증식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물산장려운동 지지자들은 대개 자본주의적인 산업의 발전을 전망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인 중소 생산업자들이 산업조합을 구성해서 우세한 일본인 산업자본과 맞서야 한다는 견해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논자들은 자작 자급적인 수공업과 가내공업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극단적인 수공업 진흥론은 근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강렬한 혐오감, 공산주의에 대한 소박한 이해, 대동 주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바탕에 깔고 있기도 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을 비판하였다. 물산장려운동으로 조선인 산업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무산계급의 생활 향상을 도모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무산계급이 정치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면 사회혁명에 조응하는 생산력을 급속히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산 장려 논쟁을 주도한 이들은 공산주의 그룹의 성원이거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 논쟁의 초점은 물산 장려운동 자체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론 전반에 걸쳐 형성되었다. 물산장려 논쟁은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이론 전이었으며 정치노선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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