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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조론과 창조론

by 영동신사 2024.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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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4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 이후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와 내부 분열 때문에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더 이상 독립운동 최고기관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국내외에서는 독립운동계를 새롭게 통일하고 강화해야 필요성이 생겨났고, 그것은 1921년 이후 국민대표회 소집론으로 이어졌다. 19212월 이후 제기되게 시작한 국민대표회 소집론의 밑바닥에는 공통으로 현재의 임시정부는 더 이상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비판의식이 깔려있었다.

 

그 이유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임시정부가 조직될 당시 각 방면의 여러 의견을 구하지 않고 소수의 사람이 마음대로 결정하여 결성했다는 자체의 한계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직위와 제도를 실제 독립운동에 적합하게 조직하지 못하여 스스로 불필요한 내부 분열만 발생시켰다. 이와 함께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이 임시 대통령으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국민대표회 소집론이 제기된 후 독립운동계는 이를 지지하는 지지파와 이를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현상 유지를 주장하는 정부 옹호파로 나뉘어 19231월 국민대표회가 정식으로 열리기까지 회의 소집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주로 이승만을 지지하는 임시정부 안의 기호파가 주축이 된 정부 옹호파는 국민대표회를 정부 붕괴 운동이라며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개조파와 창조파로 구성되었던 지지파들의 노력으로 국민대표회는 192313일부터 상해에서 정식으로 열리게 되었다. 국민대표회 개최 기간 참가 지역 및 단체는 135개이며 대표는 158명이었다. 그러나 회기 동안 자격심사를 거쳐 대표로 확정된 인원은 125명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67일 개조파들이 탈퇴한 가운데 39명의 창조파만이 참석하여 새 헌법을 제정하고 위원제 정부를 조직함으로써 사실상 결렬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최대 쟁점은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새로운 기관의 건설을 주장하는 창조파의 분열과 대립이었다. 개조파에는 민족주의 진영으로서 상해를 중심으로 임시정부 내외에서 활동하던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서북파와 기호파 일부, 서간도의 독립군 단체, 사회주의 진영 쪽에서는 윤자영, 김철수 등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 잔여 세력이 중심이었다. 창조파에는 민족주의 진영으로서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반임시정부 세력인 박용만, 신숙 등의 북경파와 사회주의 진영 쪽에서 상해파와 대립했던 김만겸 등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세력이 참여했다. 개조파와 창조파 양파에 참여했던 각 정파의 독립운동 노선은 준비론을 취했던 안창호의 서북파를 제외하면 대체로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다. 이같이 이념이나 독립운동 노선을 달리했던 각 정파 독립운동가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양립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념 때문이라기보다는 분열된 독립운동계를 통일하기 위한 최고 독립운동 기관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 이 가운데 최대의 쟁점은 곧 최고기관의 건설 문제였다. 이것은 임시정부를 어떻게 평가하고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국민대표회의 기간 개조파와 창조파 양파 사이의 최대 쟁점은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 즉 임시정부의 존폐 문제였다.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개조하자는 주장이었다. 반면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폐기하고 새로운 기관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국내외 각지에 세워졌던 정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창조파가 상해 임시정부를 일개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로 격하시킨 근거는 임시정부가 상해의 한구석에 있다는 지역적 제한성이었다.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근저에는 지역적으로나 민족 구성에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강렬한 비판의식이 깔려 있었다.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는 개조파의 문제 인식은 창조파와 완전히 달랐다. 개조파 역시 임시정부의 대표성에 한계가 있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개조파는 창조파가 임시정부의 근본적 문제로 인식했던 인적 지역적 제한성을 정부수립이라는 시기적 급박성으로 인한 불가피한 일시적인 일로 인식했다. 개조파가 임시정부를 인정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임시정부의 법통 문제가 있었다. 임시정부 법 통론은 상해에 설치된 임시정부가 개조 작업을 통해 독립운동의 주체요 중심인 국내의 한성정부 인사들을 각원으로 수용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확립되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개조파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조파의 이러한 계획은 19274월에 열린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의 현상 유지를 고집하는 정부 옹호파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반면에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창조파는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 지역대표들이 모인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새로운 최고기관을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즉 창조파는 국민대표회의에서 헌법을 제정하여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위원제 정부를 새로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이처럼 임시정부의 존폐를 두고 개조파와 창조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1923516일 개조파가 끝까지 임시정부의 개조를 하지 않는다면 타협하지 않겠다고 국민대표회의를 탈퇴함으로써 이는 사실상 좌절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는 비록 좌절되었지만 이후 독립운동의 발전에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다. 우선 민족 독립을 위한 민족적 대단결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를 위해 임시정부 법통론이나 법리론 같은 명분에 얽매이기보다는 독립운동의 실제적 근거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정부 형태 대신 당적 형태를 모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 민족 단일 당을 건설하기 위한 민족유일당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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