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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by 영동신사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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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2년간의 짧은 상해 망명 생활 끝에 19213월 귀국하였다. 그가 부형처럼 따르던 도산 안창호가 귀국을 적극 말렸으나 그는 귀국하였다. 2.8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상해로 건너갈 때의 불타던 열정이 식어버렸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신제국주의 질서가 고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는 민족 독립을 바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몸담고 있던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독립운동계 거두가 독립운동 방략과 신국가 건설 이념의 차이로 내부 갈등을 드러내자 심한 무력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혔다. 그 와중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허영숙이 상해로 건너와 귀국을 권유하자 그는 순순히 따랐다.

 

그 무렵 국내의 지주, 자본가 계급은 사이토 조선 총독의 이른바 문화정치에 넘어가 친일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사회주의가 수용되고 노동자, 농민운동이 대두하자 지주, 자본가 계급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해 줄 논리가 필요했다. 지주와 자본가 계급은 격화되어 가는 민중운동을 잠재우고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하였다. 민족 개조론은 잡지 개벽 19225월호에 실렸다. 상편은 민족 개조의 의의, 역사상으로 본 민족 개조 운동, 갑신년 이후 조선의 개조 운동으로 구성되었다. 중편에는 민족 개조는 도덕적일 것, 민족성의 개조는 가능한가, 민족성의 개조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등이 기술되어 있다. 하편에는 개조의 내용, 개조의 방법이 제시되었다. 이광수는 민족 개조를 민족 생활 진로의 방향 전환으로 규정하였다.

 

민족 개조는 정치운동(민족해방 운동)에서 문화운동(민족성 개조 운동)으로의 전환임을 암시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서 민족 개조 운동이 정치성을 배제한 단체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민족성을 민족의 도덕성으로 이해했다. 그는 조선 민족 쇠퇴의 근본 원인을 조선 민족의 도덕성 즉 허위, 이기심, 게으름, 무 신뢰, 비겁, 사회성의 결핍에서 찾았다. 그 결과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을 일제의 침략이 아니라 조선 민족이 가진 도덕성의 결함에서 찾았다.

 

그가 말하는 민족 개조의 내용은 조선 민족의 도덕적 결함을 개조하는 작업이며 개조동맹을 결성하여 추진하자는 게 그 방법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 민족의 열악한 민족성은 민족의 장래를 쇠퇴시킬 수밖에 없으며 이를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민족성 개조 운동에 있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더불어 민족 개조 운동은 철저하게 정치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민족 개조론이 발표되자 3.1운동으로 민족의식이 한층 고양되어 있던 청년 지식인층이 거세게 반발하였다. 일부 청년들은 민족 개조론을 게재한 개벽사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개벽사 사장인 최린의 집에 쳐들어가 폭행하기도 하였다. 민족 개조론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인들이 신문, 잡지의 기고문을 통해 비판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유물사관에 근거하여 이광수의 주장을 논박하였다. 이들의 반론은 주로 식민지 조선에서 최우선 과제는 도덕성 결함의 개조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라는 외재적 조건이라는 주장으로 집중되었다. 조선 민족 쇠퇴의 원인은 민족성 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있다고 본 것이다. 조선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광수가 정치성을 배제한 민족 개조 운동을 당시의 조건에 맞는 민족운동이라고 주장한 것과 달리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그 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민족해방 운동과 사회변혁 운동이야말로 민족의 행복과 번영을 약속하는 가장 지고한 민족운동이라고 인식하였다.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은 당시 청년 지식인과 사회주의자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반제국주의 이념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자, 농민운동의 협공을 받아 계급적 위기감을 느끼던 지주, 자본가 계급에 민족 개조론은 마치 양 떼를 모는 목동의 피리 소리와도 같았다. 민족 개조론은 지주, 자본가 계급이 개량주의적 민족운동의 길로 치닫게 하는 방향타 구실을 하였다. 그 결과 물산장려 운동과 민립대학 건립 운동 등 정치성이 없는 개량주의적 민족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민족 개조론에 대한 계급적 본질을 꿰뚫어 본 사회주의자의 비판이 제기되면서 민족운동 진영의 좌우 분화가 급진전하였다. 1924년 초에 이광수는 다시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였다. 친일파로 전락해 가던 지주,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대변한 것으로써 민족 개조론에서 제기한 민족 해방운동의 포기를 더욱 노골적으로 주장한 글이 민족적 경륜이었다. 이때 이르면 사회주의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주의 내부도 분화하면서 타협적 세력과 비타협적 세력으로 나뉘었다. 그 파열음이 더욱 증폭되면서 민족 내부의 갈등도 심화하였다. 그 중심에는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과 민족적 경륜 등 민족 개량주의 논리가 숨을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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