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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8.15 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

by 영동신사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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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15일 일제의 항복으로 식민지 조선 민중은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과 함께 조선은 무엇보다도 자주적 독립 국가를 세우는 일이 시급하였다. 우리 민족은 모든 분야에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는 일을 서둘러야 했다.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 곧 자주독립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길이었다. 그 중에서도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과제였다.

 

해방된 조선은 일제 식민 지배 아래에서 왜곡된 경제 체제도 바로잡아야 했다. 그것은 민중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는 일이고 자립경제의 기틀을 닦는 일이었다. 농업에서 조선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반봉건적 토지 소유였다. 해방 직후 전체 농가 가운데 3%에 지나지 않는 지주층이 경작 면적의 58%를 차지하였다. 지주층은 전체 농가의 54%였던 소작 농민과 24%의 자작 겸 소작 농민을 50~6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로 착취하였다.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농민을 봉건적 예속 상태에서 해방하고 반봉건적 관계를 철폐해야만 했다. 일제는 식민지 시기 조선 공업자본 가운데 90%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공업에서도 식민지 구조를 청산하고 조선 민중을 위한 민족경제를 확립해야 했다.

 

우리 민족은 줄기차게 독립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우리가 맞이한 해방은 연합국의 승리로 주어진 해방이었다. 해방과 함께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을 각각 점령한 미국과 소련이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민중과 민족해방 운동 세력은 해방과 함께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항복하자 민중은 전국 곳곳에서 일시적인 혼란을 방지하고 새로운 세상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여러 가지 운동을 벌여나갔다.

 

공장과 광산에서는 노동자들이,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또는 민족해방 운동가들의 지도 아래 활발하게 움직였다. 노동자는 일제의 공장 파괴 행위를 막고 생산 활동을 계속하려고 공장을 관리하는 운동을 벌였다. 공장 관리 운동은 대부분 일본인 공장이나 회사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반일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자본가를 대신하여 노동자가 스스로 회사를 운영하였으므로 자주적 성격도 띠고 있었다. 농민들도 주로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를 접수하고 관리하였다. 노동자와 농민의 활동은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생산 활동을 지속하여 이른 시간 안에 경제를 회복하려는 목적이었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경제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1945815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치안의 회복과 질서 유지를 위해 지역과 직장별로 건국치안대를 조직하고 식량 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중앙 건국 치안대는 전국에 162개 소의 지부를 두었으며, 지방에도 145개 소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조직을 설치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친일파와 부일 협력자를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하여 민족 연합전선의 성격을 띠었다. 건국준비위원회에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언론인, 지식인뿐만 아니라 지방 유지, 지주까지 참여하였다. 우익 성향을 지닌 인물까지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이 질서 유지 차원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민중의 광범한 지지를 얻어 해방 직후 어려운 정치 상황에서 치안을 유지하고 물자를 확보하는 등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할 수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 지도부는 미군 진주가 예상되자 19459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연합국의 진주를 앞두고 어떤 형태든 정부가 있어야 그들의 직접 통치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정세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비상조치로 선포되었지만, 토지와 중요산업의 국유화 같은 일부 사회주의적 경제 제도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인공 선포 후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지방 인민위원회는 10월 말까지 남한 8도와 13개 도시, 132개 군에 조직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치안대와 청년대를 조직하여 지방의 치안 유지에 힘썼고 일제가 남기고 간 재산을 관리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여러 계층의 대표자로 구성된 민중 권력 기구였으며 친일 세력을 청산하고 민중에 뿌리를 둔 조국 건설을 지향하였다.

 

194598일 인천에 미군이 상륙하였다. 남한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는 남한에 미군정을 선포하였다. 미국은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소련의 협조를 얻어 한반도 전역에 친미 정부를 세우려고 하였다. 만약 이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남한 지역만이라도 점령하여 친미 정권을 세우려고 하였다. 97일 맥아더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은 포고문 제1호에서 점령군에 대한 반항 운동이나 질서를 교란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무렵 국내 정치는 식민지 시기 친일 활동을 했던 우익보다 주로 좌익 세력이 이끌고 있었다. 좌익세력은 민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며 건국준비위원회를 인민공화국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미군정은 1010일 아널드 군정장관의 성명을 통해 남한에는 미군정이라는 단 한의 정부가 있을 뿐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곧 인민공화국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을 뜻했다.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을 한반도에 세우려 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귀국한 임시정부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전국 곳곳에서 만들어진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여러 대중 자치 기구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미군정은 남한 혁명 세력을 제거하고 남한 사회질서를 자기 뜻에 맞게 만들려는 정책을 펴나갔다. 이를 위해 미군정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보수세력이 모여 있던 한민당을 선택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 행각 때문에 숨죽여 지내던 친일파가 다시 힘을 얻었다.

 

미군정은 처음부터 좌익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국가 건설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에 협력했던 관료 계층과 보수 정치세력을 자신의 동맹자로 키워나갔다. 남한에 자본주의 체제를 세워 반공 기지를 만들려고 하였다. 결국 미군정은 8·15 광복 후 친일파를 청산하고 민족경제를 확립하여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던 우리 민족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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