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북한에 들어온 후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군정과 다른 조처를 하였다. 소련은 인민위원회의 민중적 성격에 주목하고 북한 곳곳에 세워진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점차 넘겨주었다. 북한의 인민위원회는 소련군 사령부와 협력하면서 지속하여 통치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친일 잔재도 빠르게 청산하였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시작했다. 소련군은 8월 12일에는 웅기와 나남, 16일에는 청진, 22일에는 원산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소련군은 24일 평양에 들어왔고 8월 말에는 북한 전역을 점령하였다.
한반도에서 600마일 넘게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은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자 당황하였다. 미국은 불리한 상황을 만회하려고 8월 13일, 소련에 미국과 소련 두 나라 군대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여 일본군을 무장 해제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미국이 염려했던 것과 달리 소련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38선 분할 점령 안을 받아들였다. 소련이 이 같은 태도를 보인 까닭은 먼저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할 때 생길 수 있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소련은 한반도를 주요한 전략 지역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연합국 사이의 신탁통치를 거쳐 수립될 정부가 소련에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막연한 인식만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국내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나 인민위원회에 참가하였다. 평안남도에서는 현준혁, 김용범 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함경남도에서는 정달현, 오기섭이, 원산에서는 이주하 등이 활동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련군이 진주할 때 김일성 등 항일 무장투쟁 세력도 함께 귀국하여 공산당 조직이 확대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 때문에 서울의 조선공산당은 북한지역의 공산당 조직을 지도하기 어려웠다.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서북 5도 당원 및 열성자 연합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창설되었다.
이름과 달리 북조선 분국은 서울에 있는 중앙당의 지도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북한에서 혁명을 진행해 나갔다. 1946년 2월에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해방 후 북한지역 곳곳에서 만들어진 여러 형태의 지방자치 기관들은 인민 위원회로 통일되었다.
지방 인민 위원회는 행정권을 장악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공공기관과 산업시설을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지방마다 인민 위원회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강화하였으며 1945년 11월 19일에 북조선 행정 10국을 조직하였다. 행정 10국은 각도를 연결하면서 경제, 문화, 보안 사업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다. 임시 인민위원회는 2월 23일에 일제 잔재 청산, 국내 반동 세력과의 투쟁,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개인 상공업 장려,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 실시, 8시간 노동제 확립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20개 정강을 발표하였다.
임시 인민위원회는 3월 5일 북조선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북한에는 주민의 74%가 농민이었으며 농가 호수 가운데 4%인 지주들이 총 경지면적의 58%의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 농가의 약 70%는 순 소작농 또는 반소작농이었으며 자작농은 약 25%에 지나지 않았다. 토지개혁의 결과 지주 계급은 완전히 사라졌고, 부농층이 약화하였으며 빈농과 중농이 농민의 대다수를 자치하게 되었다. 몰수된 토지는 총 경지면적의 52%에 이르렀으며 지주 토지는 약 80%가 몰수되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20일 정도의 짧은 기간에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북한은 군중들을 동원하고 개혁의 열기를 고조시킨 다음 빈농을 중심으로 토지개혁을 추진하였다. 토지개혁의 결과 봉건적 지주, 소작 관계가 폐지되고 농민적 토지 소유가 확립되었다. 토지개혁에 이어 1946년 6월에는 8시간 노동제를 규정한 노동법령, 7월에는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률이 발표되었다.
주요 산업 국유화 법령이 공포되어 일본인, 민족 반역자가 소유한 공장과 회사,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었다. 주요 산업의 국유화는 그 후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앞장서서 선도하는 부문이 되었다는 점에서 토지개혁 못지않게 중요한 과업이었다. 북한은 민주개혁을 완수하고 식민지 경제구조를 철폐하여 민주기지를 세우려고 했다.
북한은 이제 소련군이 진주한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북한에서 혁명을 먼저 완수하고 아직 해방되지 않은 지역을 나중에 해방한다는 민주기지론의 입장에서 해방정국에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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