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구 우생학의 탄생 class="layout-aside-right paging-number">
본문 바로가기
근현대사 주요 이슈

19세기 서구 우생학의 탄생

by 영동신사 2024. 3. 30.
반응형

인종주의는 생물학적 분석 기준을 근거로 해서 여러 인종을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차별하거나 구분하며 가치가 낮은 인종을 가치가 높은 인종에 종속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인종주의에는 두 가지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자신들과 다른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그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 부분으로서 인간종과 관련된 어떤 주의를 말한다. 인종적 관계는 이론적인 문제도 아니고 과학적 논쟁을 거쳐서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9세기의 인종 이론은 18세기까지 축적된 이론적 경험을 모태로 하였다. 18세기 인종 이론은 인종의 형태적 특성, 환경적 조건 등 다양한 요소를 준거 틀로 삼았다. 인종 사이의 차이를 추론하고 계층화된 인종 모델을 제시하여 19세기 인종주의가 형성되는 데 필요한 생물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생물학이 급속히 위상을 높여가던 시기로서 생물학은 다윈의 생존 경쟁론과 더불어 내셔널리즘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생물학, 다윈의 진화론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던 내셔널리즘이 맞물리면서 고대의 자연적 종족주의가 인종주의라는 외피를 걸친 근대적 형태로 부활하였다.

 

18세기의 성과를 집대성하여 19세기에 인종 이론의 기반을 마련한 대표적인 사람은 인류학자 고비노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귀족 출신으로서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배격한 인물이다. 고비노는 루소와 같은 인간 평등 사상에 대립하고 인간 상호 간에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치의 상하가 있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차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비노는 개인만이 아니라 각 민족도 본래부터 다른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고비노는 인류를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으로 나누고 흑색인종을 인종 가치의 아래 최하위 등급으로, 백색인종을 최고 가치의 인종으로 평가하였다. 고비노는 특히 백색인종 중에서도 아리안계가 가장 우수하고 아리안계 중에서도 게르만이 가장 걸출하다고 주장하였다. 고비노는 각 인종이 창조적 능력에서 불평등하기 때문에 후진 인종은 문명적으로 고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19세기의 인종주의는 사회진화론과 강하게 결합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는 이론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 공통점은 두 이론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두 이론은 모두 생물학적 준거 틀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하여 인간 사이의 자연적 불평등을 주장하였으며, 자연적 불평등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에 반대하고 신분적이고 엘리트가 주도하는 사회질서를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상정하였다.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이론은 세계적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기에는 기능적으로 특수한 결함을 갖고 있었다. 두 이론 각각의 결함은 두 이론의 결합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사회진화론의 기능적 결함은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 결함은 국가를 하나의 혈연적 공동체로 인식하는 인종주의에 의해서 보완될 수 있었다. 인종주의에는 인종을 제국주의적 생존 투쟁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생물학적 근거나 투쟁적 윤리 기반이 부족하였다. 인종주의 입장에서는 전투와 투쟁을 자연적인 생의 법칙으로 장려하는 생물학적 토대와 동태적인 공격성으로 무장하고 있는 사회진화론에 의해서 제국주의적 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생존 투쟁이 필연적인 생의 투쟁이며, 강고하고 유능한 인종만이 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며, 우승열패야말로 세계의 진보를 촉진하는 자연의 법칙이라고 강조하는 방식으로 인종 이론이 보완되었다.

 

유럽에서 사회진화론과 결합한 인종주의는 먼저 반유태주의로 나타났다. 사회진화론적 인종주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다 같이 거부하였다. 인종주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유럽의 쇠퇴를 초래한 사상으로 규정하였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의해서 유럽의 인종적 쇠퇴를 초래한 유대인이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동화될 수 있기 때문에 각국의 정치적, 문화적 생활로부터 유대인을 배제하는 일이 유럽의 인종적, 정신적 통일을 회복하는 데 유익하다고 주장하였다.

 

인종 학설은 히틀러의 전체주의와 인종적 내셔널리즘을 서슴없이 받아들이게 하였다. 전체주의적 내셔널리즘은 개인보다 국가 사회에 권위와 절대적 우월성을 부여하였다. 또한 정예분자들을 철저하게 훈련해 잘 무장된 전위로 키워서 결정적인 중대시기에 단호하게 권력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인종 이론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뿌리박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기 쉬웠다.

 

1차 세계대전은 동·중부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통적 권위와 사회질서를 붕괴시킴으로써 전제주의 대두를 위한 길을 열어 주었다. 사회진화론과 결합한 인종 이론은 19세기 서구사회의 제국주의적 요구를 정당화하고 전체주의나 파시즘을 이론적으로 보완하는 기능을 하였다.

 

사회진화론적 인종주의는 같은 시기에 학술적 측면에서는 우생학으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특히 일본의 인종주의론 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도 언급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우생학의 창시자 프란시스 골턴이다. 일본 인종주의론 자의 학설은 식민지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수용되어 식민지 조선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