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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대북정책

by 영동신사 2024.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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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5.16 군사 쿠데타 당시 혁명 공약 제1항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박정희는 반공에 집착하였다. 1961년 반공법을 제정하고 반공법을 법적 기초로 하여 반공 규율 사회를 정착시켜 나갔고, 반공 의식을 국가의 핵심 이념으로 활용하였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북한 통일정책은 승공 통일을 이루기 위한 실력 배양이며, 선건설 후 통일이었다.

 

이 두 가지는 상호 연결되는 선후 맥락의 논리 구조를 갖고 있었다. 집권 후 오로지 개발주의 사고방식으로 경제 건설과 반공 정책에 매달린 박정희는 두 개의 목표를 그대로 대북 정책에 적용하였다. 승공 통일을 위해서는 경제 건설을 통해 실력을 배양해야만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박정희 정권에게 통일은 조건이 성숙할 때까지 남북한이 서로 싸우지 않고 공존하는 것을 의미했다. 박정희는 집권 기간에 3단계 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1단계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 단계, 2단계는 민족의 동일성을 회복하는 단계, 3단계는 남북 총선거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단계로 상정하였다.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의 해였던 1967년 연두 교서를 통해 통일의 길은 경제 건설과 민주 역량의 배양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경제, 우리의 자유, 우리의 민주주의가 북한으로 넘쳐흐를 때, 그것이 곧 통일의 길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박정희는 같은 해 418일 전주에서 대선 유세를 하면서 오늘의 단계에서 통일의 길은 곧 경제 건설의 길이며 민족 역량의 배양에 있다면서 통일을 경제 건설의 목표 속에 해소해 버렸다. 통일 문제는 70년대 후반에 가서나 본격적으로 논의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사실상 통일에 대한 논의를 회피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내내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를 억압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는 국내외에서 통일 논의가 적지 않게 일어났다. 196411월 재미 한국 문제 연구소장 김용중은 남북 동수로 통일위원회 구성, 이산가족 상봉, 남북 여행과 이주의 자유 등 인도주의적 조치 즉각 시행, 모든 외국 군대 철수, 통일 위원회 감시 아래의 남북 총선거 실시, 중립적 지위 확립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통일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1966년 창당한 통일 사회당은 자주·민주·평화적 통일, 남북 교류 실시, 중립적 통일 한국 추구, 통일 문제에 관한 초당적 연구기관 설립 등의 내용을 채택하였다. 1967년 신민당은 통일을 위한 범국민적 협의체 구성, 정부 내 통일 전담 연구부서 설치, 통일 논의 자유 보장, 정신적 균형 방식으로 남북 간의 인도적 서신 및 기자 교류, 국토 분단 국가 회의 구성, UN 대상 통일 외교 강화 등을 주장하였다.

 

이런 국내외적 흐름은 통일 논의를 경계하는 입장과 반대로 적극 찬성하는 입장으로 대변되어 1960년대 통일 논의를 형성하였다. 1960년대 중반 대내외적으로 형성된 일련의 통일 논의와 국회의 활동과 건의에 따라 박정희 정권은 19693.1절을 계기로 정부 부처의 하나로 국토 통일원을 설립하였다. 국토 통일원의 설립이 기존 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3 공화국은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를 수렴하지 않고 금기함으로써 국민 대중의 의사가 반영되는 투입과 산출의 기능이 마비되었던 시기였다.

박정희는 197019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1970년대 통일 정책의 기본 방향을 설명하면서 70년대는 통일을 위한 우리의 준비를 완료하는 연대라고 강조하였다. 조국 근대화라는 중간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고 통일에 대한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는 것이 70년대 통일에 대한 나의 생각이고 전망이라고 밝혔다. 박정희의 이러한 언급은 1960년대를 청산하고 1970년대 국정 전반에 관한 정책 구상 제시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1960년대에 걸쳐 지속해서 표방한 일방적 선건설 후통일론은 1970년대 초 남북 대화를 계기로 단계론, 교류 협력론, 평화 공존론으로 제시되었다. 기능주의적 단계론, 교류 협력론은 통일을 위해 점진주의적인 단계적 접근 방식을 취한다는 입장으로 비정치적 분야의 교류를 점차 정치적 교류로 접근하여 완성된 형태의 통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실현한다는 개념이었다.

 

박정희의 분단 극복 모델은 동서독형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상황을 동서독형 평화공존으로 전화시켜 나가려고 하였다. 동서독 사이의 대화와 공존은 통일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박정희의 대북 통일 정책과 일치하는 측면이 많았다. 동북아 냉전 구조가 해체되는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의 통일 정책은 열강의 세력 균형에 의한 평화 공존, 즉 현상 유지를 기조로 하는 대외 정책을 수립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북 정책 역시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이 제거된 안정된 두 개의 한국, 즉 분단의 합법화를 통한 긴장 완화를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박정희 정권은 대내적으로는 남북한 사이의 불가침 협정 체결, 대외적으로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공산권에 대한 문호 개방, 나아가 주변 강대국에 의한 남북한 교차 승인 등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19736.23 선언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듬해인 1974년 박정희의 평화통일 3대 기본 원칙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남북 간 상호 불가침 협정의 체결, 상호 문호 개방과 신뢰 회복을 위한 남북 대화 계속과 교류 협력, 토착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 총선거 실시 등이다. 이 발표는 박정희 정권의 대북 통일 정책을 종합한 것이지만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무엇보다도 평화 유지의 원칙만을 통일의 대전제로 설정한 것은 통일보다 평화 유지나 현상 유지로 흐르기 쉬운 측면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집권 기간에 통일은 먼 장래의 일이며, 그 전에 실력을 배양하고 국력을 키워야만 그때 가서 통일을 모색할 수 있다는 매우 모호한 통일 인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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