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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남북 적십자 회담의 전말

by 영동신사 2024.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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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8월부터 19738월까지 모두 일곱 차례 진행된 남북 적십자 본 회담은 그 대화 과정에서 남북 간에 여러 가지 쟁점을 형성하였다. 합의된 회담 의제를 놓고 진행된 양측의 논란을 통해서 남한과 북한의 서로 다른 인식의 실체를 확인했으며, 방법론의 차이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남북 적십자 본 회담의 쟁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산가족과 친척 찾기 방법을 둘러싼 문제이다, 남한 측은 문서 교환 방식을 주장하였다. 반면 북한 측은 자유 왕래를 주장하였다. 4차부터 7차 본회담까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남한 측의 주장은 남북 적십자 사이의 공동 문서의 작성, 교환으로 심인 사업을 수행하며 판문점에 사업소를 설치하여 이를 보장하자는 내용이었다. 북한 측의 주장은 본인 스스로가 알아내는 직접적 방법을 기본으로 하여 사정에 따라 본인인 직접 찾아가지 못할 경우에는 간접적, 보충적 방법도 적용할 수 있게 하자는 입장이었다. 북한은 제4차 본회담에서 남북이 15년 전에 의뢰서를 교환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자신들이 회답해 준 자료를 가지고 남한이 오히려 비방하는 자료로 이용한 사례가 있다며, 15년이 지나도록 한 건의 회보도 받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의뢰서, 회보서를 통한 남한의 의견을 복잡한 문서 놀음이라고 비판하였다. 의뢰서 제출 방식은 우리나라 현실에 맞지 않는 방식이며 남한 측의 법률적, 사회적 조건 때문에 잘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 가족, 친척의 범위와 대상에 관한 차이였다. 4차부터 7차 본회담까지 이 문제는 지속해서 쟁점이 되었다. 이 논점은 두 갈래 내용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당사자의 신청에 따라 가족, 친척으로 인정하자는 북측의 주장과 본인의 호소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상호 확인이 필요하다는 남한 측의 주장에서 오는 차이였다. 다른 하나는 재일 교포들도 남북 이산가족 범위에 넣어야 한다는 북한 측의 주장에 따른 쟁점이다.

북한 측은 특히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에 소속된 재일 조선인은 절대다수가 남한에 가족, 친척을 두고 있기 때문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한 측은 본회담 의제 제5항의 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 논의 과정에서 그 문제를 해소하자고 주장하였다. 북한 측은 가족과 친척은 누가 주관적으로 정해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남한 측의 적십자사에 의한 상호 확인 주장을 반대하였다. 남한 측은 가족과 친척으로 지목하는 당사자 자유의사는 보장이 되고 지목당하는 사람의 자유의사는 보장이 안 되는 문제가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 문제는 남북 적십자사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 남한 측은 재일 교포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해외 동포도 마찬가지인데 재일 교포만 언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는 북한 측의 조선인 총연합회까지 포함해 우세를 차지하려는 북한 측의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판단한 측면이 있었다.

 

셋째, 북한의 조건, 환경 해결 주장과 남한 측의 적십자정신 관철 주장의 충돌이었다. 이 문제 역시 제3차에서 제7차까지 양측이 팽팽히 맞섰다. 적십자 본회담 과정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되었던 문제였다. 북한 측은 남북 사이의 왕래와 연계를 원만히 실현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법적인 방해물로서 국가 보안법과 반공법을 거론하며, 이 법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사회적 환경 조성을 위해 반공 정책과 반공 단체들의 활동, 반공 교육, 반공 선전 등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해 남한 측은 이 문제는 적십자 회담과 관계가 없는 사항이라고 규정한 뒤 대한민국 내부 사항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십자 회담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남북 공동 성명의 정신에 위배 된다는 입장이었다. 당사자들이 직접 상호 방문을 통해 가족, 친척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북한 측의 주장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 남측의 반공법이나 국가 보안법 또는 반공 단체들의 저항과 위협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에서 회담할 때마다 동원되는 경찰, 군인 등도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북한 측의 내적 논리로 보면, 남한 측이 회담의 순조로운 진행을 회피하는 처사라고만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남한 측의 입장에서 보면 체제와 관련된 민감한 문제를 선결 조건처럼 제시하는 북한 측의 태도를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동된 남북 조절 위원회에서 이 사안을 논의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남한 측에서는 공동 성명 발표 이후 내부적으로 반공법, 국가 보안법 폐기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여 민감하게 반응했다.

 

넷째, 북한 측에서 제기되어 제3차부터 제6차 본회담까지 논란이 되었던 해설 인원 파견 주장도 쟁점이 되었다. 북한 측은 자유로운 환경과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라면서 적십자 해설 인원을 한 동()에 한 명씩 서로 파견하자고 주장했다. 남한 측은 상대방 지역에 들어가서 자기 측 선전 활동을 하면 상호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기 측 지역은 각자 책임을 지고 적십자 사업을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북한 측의 주장은 양측이 작성한 합의서에 포함되어 있다는 입장이었다. 남한 측은 기존 합의서에 따르면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 논란 과정에서 양측 입장의 근거가 되는 합의서의 구체적 표현이 각각 다른 점이 확인되었다. 당시 하나의 합의서가 채택되지 못했으며 기본 의사만 통하면 하기로 한다는 차원에서 상호 합의서가 작성되었으나 그 같은 문제가 이후 논란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자문 위원 발언 문제는 합의되지 않았으나 기존 합의서의 차이점이 발견되었다. 적십자 본회담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양측 사이에 합의한 내용이 일치하지 않은 채 서로 서명 교환을 거치게 된 것이다.

 

다섯째, 7차 본회담에서 남한 측에서 제기한 추석 성묘 방문단 교환 사업과 북한 측의 대응도 논란이 되었다. 추석 성묘 방문단 교환 사업은 적십자 예비 회담 과정에서 등장하였지만, 남한 측은 적십자 본회담의 분위기 조성이라는 목적에서 이 사업을 제안하였다. 북한 측은 남한 측의 새로운 제안은 회담을 지연시킬 뿐이라고 하면서 관광단 같은 인상을 주며, 법률적, 사회적 환경을 먼저 조성하는 것이 근본 문제이며 선결 과제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적십자 본회담 과정을 살펴보면, 당시 남북 관계 속에서 드러난 북한 측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쟁점은 북한 측이 제안하고 문제를 제기하여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남한 측이 제기한 추석 성묘 방문단 교환 사업을 제외한 모든 논점이 북한 측의 제기에 의해 비롯되었다. 북한의 적극적인 자세로 볼 수 있다. 내용도 상당히 공세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사자들의 직접 호소로써 이산가족을 확인한 후 직접 상호 방문하여 찾아 나서자는 주장을 비롯하여 해설 인원을 상대측에 파견하고 본회담에서도 자문위원들에게 발언권을 주자는 주장 등은 남북 사이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개방하자는 취지로 해석된다.

 

북한 측은 조선인총연합회 계열 재일 교포들에게도 남북 이산가족 범위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과 법률적, 사회적 환경 개선론을 선결 과제로 주장하면서 남한 측의 법, 제도, 사회 분위기까지 바꾸려는 파상적 공세를 폈다. 북한 측의 회담 태도는 포괄성과 적극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결국 그 같은 북한 측의 자세를 남북 사이의 이산가족 상봉 과정이 실제로 전면적인 남북 사이의 왕래를 의미하며, 당시 상황을 통일 분위기 형성의 결정적인 국면으로 상정한 결과로부터 도출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문제를 계기로 남한 측은 인도주의적 사안으로서의 남북 교류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대했지만, 북한 측은 이산가족 상봉 사업으로 인해 장차 남북 사이의 전면 개방과 교류 국면을 이끌려는 입장을 추구했기 때문에 회담 과정에서의 충돌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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