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북한은 전쟁 후 수세적이고 자기방어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대남 정책을 전환하였다. 남한에 비해 상대적 경제 우위를 확보했으며 안정적인 체제 구축에 성공했다는 자족감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 반대파의 도전으로 야기된 노동당 내부의 갈등 양상을 해소하여 연안파와 소련파를 축출하고 김일성 중심으로 권력 체제를 확고히 다진 정치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안의 권력 투쟁과 소련, 중국의 대국주의적인 내정 간섭에 반발하면서 김일성은 자주 노선을 내세우게 되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중소 분쟁의 격화, 남한에 강력한 반공 정권의 등장, 한일 관계의 정상화 추진, 월남전의 확대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남조선 혁명을 추진해 나가게 시작했다. 북한은 1961년 9월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에서 4.19 항쟁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로 남한에 진정한 마르크스 레닌주의 정당이 없었던 데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며, 남한 안의 혁명 정당 결성을 공식 주장하였다. 당시 베트남 전쟁의 영향에 따른 남조선 해방 전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63년 3월 북한은 기존 대남관계 부서를 통폐합해서 대남 총국을 설치하고 대남 침투 활동을 한층 강화했다. 1964년 3월 남한 내 혁명적 정당으로서 통일 혁명당 창당 준비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65년 4월 김일성은 민주 혁명 기지 이론에 근거하여 3대 혁명 역량을 강화하여 남조선 혁명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 통일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북한은 남조선 혁명론을 강조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1970년 3월 1일 재미교포 고병철이 통일 문제와 관련한 편지를 보내자, 6월3일 김일성의 위임에 따라 조국 평화통일 위원회가 이극로, 강량욱, 백남운, 이기영, 홍기문, 김석형의 연명으로 답장을 보냈다. 여기서 제시된 통일 방안에 의하면, 미군 철수 후 남북 사이에 평화협정 체결과 상호 군축, 남북 총선거 실시로 통일 중앙정부 구성, 필요시 과도적 연방제 실시, 남북 사이의 통상과 교류 실현, 편지 거래와 인사 왕래, 남북 협상 진행 등을 제시하였다. 남조선 혁명론과 남북 협상 노선의 동시 추진으로 볼 수 있다. 1970년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에서 제시된 통일 정책은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 핵심 내용은 남한의 현재 정권을 전복한 후 미군이 완전히 철수한 상태에서 평화를 사랑하고 중립적이며 민주적인 인사들과 협상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약 10만 명 선으로 군을 감축하고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며 경제, 문화 교류를 실현한 후 남북 총선거 혹은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연방제를 구성하여 통일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다. 데탕트 기운이 한반도에 밀려드는 시점에서도 북한의 남조선 혁명론은 지속되었다. 북한의 남조선 혁명론은 1970년대 초 대화의 시작 단계까지 공개적으로 천명되었다. 특히 1972년 7월 3일, 남북 공동 성명 발표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도 북한은 중앙 방송을 통해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행한 김일성 수령의 사업 총화 보고 중 남조선 혁명과 조국 통일에 관한 해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남조선 혁명과 조국 통일의 상호 관계라는 제목의 정책 해설 논문을 보도했다. 이 보도에서도 폭력 투쟁에 의한 남조선 혁명을 역설함으로써 북한의 혁명적 대남 정책을 그대로 노출하였다. 이 같은 북한의 대남 정책 기조는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후인 같은 해 10월 5일 조선로동당 대표자 회의 6주년에 즈음한 김일성 연설에서도 재확인되었다. 1960년대부터 데탕트에 이르는 1970년대 초까지 북한의 통일 대남 정책은 3대 혁명역량 강화라는 일관된 노선을 유지하면서, 1960년대 말 군사적 편향을 지나 1970년대에 들어서 남북 대화 정책으로 이어지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북한의 대남 강경 정책은 완화되게 시작했다. 북한으로서는 남조선 혁명을 위한 통일 전선 형성에 남북 대화를 활용한 것이며, 대외 환경이 긴장 완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 문제가 제기되는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권에게 전쟁 억지의 과제가 부여될 수밖에 없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북한은 1970년대 초부터 남조선 혁명을 추구하면서도 남한 내 통일 혁명당 조직 거점들이 붕괴하는 상황 등 여러 조건을 감안하여 남북 대화를 추진함으로써, 평화와 전쟁 양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 계기가 된 시점이 1970년 11월 노동당 제5차 당대회로 볼 수 있으며, 이때부터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대남 노선이 유연성을 띠기 위해 시작하면서 주체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었다. 북한의 통일 전략으로서의 남조선 혁명론과 대남 전략의 하나로서 남북 대화 정책의 구사가 동시에 병행되어 나가는 과정이 이 시기였다. 기본적으로 남조선 혁명을 추구하던 북한이 1970년대 초 남북 대화를 적극 추진한 점은 분명 변화이지만, 그 같은 변화가 모순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 북한의 남북 대화와 접촉이라는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남한 변혁론의 재정립과 무관하였다. 국제 환경의 여건이 일정하게 변화했지만 4.19와 같은 남한의 혁명적 요인은 계속 잠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증진되고 있다는 판단 아래에 비합법적인 혁명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남북 대화를 통해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방법을 병진하는 정책이 대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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