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생학을 창시한 사람은 프란시스 골턴이다. 우생학이란 말은 인간 능력의 탐구라는 골턴의 저서 속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오래지 않아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19세기 말 한 종의 다른 종으로 변형이라는 탐구를 시작한 사람은 에라스뮈스 다윈이다. 그의 생각은 후에 이종 간의 두 후계자인 찰스 다윈과 프란시스 골턴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그러나 후에 프란시스 골턴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버리고 인간 개선을 위한 인위적인 방법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골턴은 인간 혈통은 가축 개량처럼 인위적인 선택에 의해서 개선될 수 있다는 우생학을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인종주의의 사회적 적용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학술적 측면에서 체계화한 사람이 바로 골턴이었다. 전직 의사, 지리학자에서 인류학자, 우생학자로 변해갔던 골턴은 생물학적 요소에 관심을 기울였다. 다윈이 발전시킨 유전 가설은 육체의 조직이 혈액 속에서 거의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소 아체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윈은 피가 소 아체를 성별 선으로 나르고, 성별 선은 소 아체를 성별 세포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가정하였다. 다윈은 소아체 가설을 후천적인 특성의 유전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골턴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골턴은 후천적 특성은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 점이 진화론에 대한 찰스 다윈과 프란시스 골턴의 차이이다. 진화론에서 획득 형질의 유전 유무에 대한 입장 차이는 골턴이 다윈의 자연도태론 대신 인위 도태론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변화하는 이론적 계기를 제공하였다. 골턴의 상상력에는 사회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여행 중, 골턴은 다양한 인간 사회를 보았다. 그는 인간 육체의 특징 속에서 다양성을 보았으며 심리 상태의 차이는 보다 더 클 것으로 생각하였다. 골턴은 다양성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으로 우수한 요소는 반드시 유전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인간 혈통은 가축이 개량되는 것처럼 인위적인 선택에 의해서 개선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골턴의 관심 대상은 궁극적으로 정립되어야 할 특성,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요소의 범위를 측정할 수 있는 기술, 측정 결과에 따라 열등한 형질을 가진 인간의 번식에 대한 통제 등 이었다. 그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생학을 발전시켰다. 골턴은 선택에 의하여 특별한 재능을 갖추게 되는 인종은 진보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심지어 도덕적, 종교적 감정이나 정서는 엄격한 선택에 의해서 개선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골턴의 저서 속에는 유전과 환경을 두 축으로 사고하는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 골턴은 유전은 특정 영역에서 현저하게 영향을 미치며, 환경은 또 다른 영역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경향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특히 재판관, 장군, 과학자, 정치가, 화가, 시인 등 일정한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으며 각 개인의 개성을 유전과 환경이 주는 이점의 조화로 간주하였다. 골턴은 인류학자가 인간 해부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했던 것처럼 인간 정신의 범위에 관한 통계를 수집했다. 그는 만약 정신적, 육체적 특징이 인간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신장, 몸무게, 피부 등의 인체 측정 수단은 감각, 기억, 상상 등의 정신 측정 수단에 의하여 보완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우생학의 명제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는 필연적으로 측정의 문제에 뛰어들었다. 1884년 골턴은 런던에 인체 측정학 연구소를 세우고 청각, 근육의 감각, 냄새와 접촉 감각 등에 대한 측정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골턴의 연구는 유전, 인체 측정학, 정신 측정학, 통계에 집중되었다. 골턴의 여러 요소의 측정과 작업은 인종 개선을 위한 보조 수단이었다. 골턴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도 육체적 특성과 같이 유전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회적 조치를 통해서 의식적으로 유전 인자의 자연도태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유전 인자를 개선해서 인간의 진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골턴의 생각은 우생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우생학자들은 인종이 변종이 되는 것을 막고 인구의 유전 인자를 개량하는 것을 중심 과제로 설정하고 그것을 위한 사회 정책적 조치를 주장하였다. 이후 사회운동으로 전개된 우생학은 모든 사회 문제를 유전 생물학, 사회진화론으로 해석하면서 우생학적 사고를 사회진화론, 인종주의와 혼합하였다. 우생학은 유전 인자를 절대화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육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인종의 유전적 변질의 위험을 제거하고 유전적으로 유용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선택하고 유전 인자의 자연도태를 조정하는 사회 정책적 조치를 요구하였다. 골턴의 우생학이 일본의 인종주의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일본의 인종주의자들은 골턴이 처음 사용한 우생학이란 용어를 인종 개선학, 민종 개선학 등으로 번역하고 서구 사회에서 유행한 우생학의 논리를 빌어서 일본 인종을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본의 인종주의자들의 주장은 식민지 조선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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