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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우리나라 근대 인구 변동의 추이

by 영동신사 202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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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변동과 사회 변화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서구의 근대화 시기에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세계사에서 산업 혁명 이후에 급속히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의학이 발달하였다. 그 결과 인구가 급증하였다. 1650년경 5억 명이었던 세계 인구는 1830년경 10억 명, 1930년경 20억 명, 198840억 명으로 증가하여 그야말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반면 식량, 주택, 일자리의 공급은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 결과 분배를 둘러싼 개인, 계급, 민족 사이의 경쟁과 갈등이 한층 급증하였다. 사회 변화의 결과로 인구 변동이 나타나지만 인구 변동이 사회 변화를 이끌기도 한다. 정확한 통계 조사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를 확정하기는 어려우나, 우리나라 인구는 대략 18641700만 명, 19101750만 명 수준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쓰인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에 4천년 강토와 5백 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민을 몰아 다른 사람의 노예로 만들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1907년 정미 7조약 이후 의병의 격문에도 4천년 역사, 3천리 강토, 2천만 동포라는 표현이 자주 확인된다.

1910년 대략 1742만 명에 불과하던 인구는 1945년에는 2530만 명이나 되었다. 35년간 무려 1200만 명이 증가하였다. 나라가 망하기 전 2천만 동포가 해방 후에는 3천만 명이 되었다. 우리나라 인구는 식민지 시기 후반부터 전통적인 저성장 현상인 많이 낳고 많이 죽은 형태에서 벗어나 산업화 초기의 많이 낳고 적게 죽은 형태로 이행하게 시작하였다. 사망률의 저하는 일차적으로 의약 및 보건 제도의 개선에서 비롯되었다. 의약 및 보건 제도의 개선 사업은 지석영의 천연두 예방 접종의 시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조선 말기부터 시도되었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하였다. 천연두 예방 접종 사업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식민지 시기 이후였다.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의 건강 유지, 부차적으로는 식민지 지배와 수탈에 필요한 노동력 수요의 증대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의료 인력과 의약 보급의 증가도 사망률 저하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양방 의료 시설이 주로 도회지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농촌 주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의료 인력의 증가보다 사망률의 저하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의약품의 생산, 수입 및 보급의 증대였다. 지금도 그렇듯 식민지 시기에도 결핵, 천식, 감기, 폐렴, 성병, 소화제, 자양 강장제 등 각종 의약품 광고가 연일 신문 지상을 장식하였다. 의약품은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수입, 판매되었다. 사망률 저하에 따른 급속한 인구 증가는 경지 면적을 둘러싼 소작 쟁의와 같은 사회적 갈등을 가중했고 농업 경영에서 몰락하는 농민층이 증가하였다. 몰락한 농민 중 상당수는 이농하여 대도시로 몰려 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날품팔이 막노동 등에 종사하는 도시 빈민층이 되었다. 1930년대 이후 일제의 만주 침략이 개시되고 식민지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의 노동력 수요가 증대하였다. 그 결과 식민지 시기에 신흥 도시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전통적인 행정도시 가운데 공주, 안동, 경주, 동래, 밀양, 수원 등은 인구가 정체하거나 감소하였지만, 서울, 평양, 대구 등은 1930년 이후 급증하였다. 특히 서울 인구는 192534만 명에서 해방 직전에 100만 명에 달하였다. 대도시는 대체로 행정 중심지이거나 경제 수탈 중심지였다. 1937년 현재 도시 인구의 18%인 일본인이 도시 조세액의 58%를 부담하였고 80%의 한인은 겨우 40%를 부담할 정도로 한인의 경제력은 빈약하였다. 국내에서 삶의 터전을 찾지 못한 동포들은 남부여대하여 이역만리 해외로 떠나갔다. 그 숫자는 식민지 35년간 총증가 인구의 26%에 달하는 327만 명이나 되었다. 해외 출생 인구까지 포함하면 1945년 현재 해외 동포는 일본 210만 명, 만주 160만 명, 중국 본토 10만 명, 소련 20만 명, 미주 2만 명으로 합계 402만 명이나 되었다. 이는 국내 거주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이다.

1945815일 해방과 함께 해외 동포들이 귀환하였다. 재일 교포 150만 명, 재만 동포 60만 명, 중국 기타 지역에 거주했던 동포 10만명가량이 귀환하였다. 해외 거주 402만 명 동포 중 절반 이상인 220만 명이 귀환한 셈이다. 문제는 해외 동포 상당수가 남한으로 귀한 하였다는 점이다. 동시에 해방 전 북한에 거주하던 남한 출신자, 소련과 북한 정권에 반대한 우익,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벌을 기피하려는 지주, 친일파들이 한국전쟁 직전까지 지속해서 남한으로 월남하였다. 해방 후 남한 인구는 사회적 이동만으로 188~253만 명가량 증가하였다. 이는 1945년 당시 남한 인구 1614만 명의 12~16%에 이르는 수치였다. 한국전쟁은 또 한 차례의 인구 변동을 초래하였다. 전쟁 중 인구가 일시적으로 감소하였다. 월남 인구는 대략 40~65만 명에 달했으나 전사, 행방불명 등이 90만 명 월북 또는 납북이 많게는 30만명으로 추정되어 전쟁에 의한 사회적 감소 인구는 약 50만 명에 이르렀다. 더구나 전쟁으로 인한 출생률의 저하와 사망률의 증가까지 합치면 130만 명의 인구가 감소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후 1955~60년 사이에 남한의 인구는 다시 급증하였다. 환국과 월남, 베이비 붐으로 해방 직후 1614만 명이던 인구는 1960년에 2499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농민, 귀환 동포, 월남민은 구호의 혜택과 고용의 기회를 찾아 대도시로 몰려 들었다. 1949~60년 사이 도시 인구는 347만명에서 7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가운데 서울 인구는 144만 명에서 245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도시 인구의 증가는 경제 발전의 산물이 아니라 망국, 해방과 분단, 전쟁이라는 굴절된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사회적 변동이 초래한 산물이었다. 해방 후의 도시는 이농민, 귀환 동포, 월남민, 이념 대립의 피해자 등이 구호와 고용의 기회에 희망을 걸고 찾아드는 불안한 안식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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