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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개신교의 한국사회 정착과정

by 영동신사 2024.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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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입국으로 개신교의 공식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공식 활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조선인들은 만주와 일본을 통해서 성경을 접했고,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초기 신자를 중심으로 성경 중에서 신약 부분의 번역이 만주에서는 1877년부터 1886년 사이, 일본에서는 1883~87년에 이루어졌다. 나중에 선교사 중심으로 추진된 성경 번역은 이런 초기 번역본을 개정하면서 만들어졌다. 1900년에 신약이 번역되었고, 1910년에는 구약이 우리말로 간행되었다. 한글판 성경의 등장은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데 획기적인 계기였다. 유교 경전에 권위를 부여하던 태도를 신자들은 성경에 적용하기 위해 시작했고, 신앙생활은 성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자신의 신앙관을 관철해 나가는 과정에서 개신교는 한국의 사회, 문화적 맥락과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변화하게 되었다.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선교전략을 구사했다. 의료와 교육사업을 통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려 개신교 선교의 기반을 마련한 간접 선교방식을 선택하였다. 개신교는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개신교는 한국의 전통사상과 관습에 대하여 가차 없이 비난을 퍼부었으며, 근대문명으로서의 자신과 대조적인 야만을 성토했다. 가톨릭이 우상숭배와 정교일치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한 것도 개신교의 이러한 차별화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전통사상과 관습에 대한 개신교의 비난은 여러 야만의 수준을 상정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불교와 유교처럼 상당히 세련된 사상과 제도를 구비하고 있는 경우와 무속과 민간신앙처럼 제도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 개신교의 공격 목표는 다르게 설정되었다. 무속과 민간신앙에 대한 개신교의 공격은 악마 숭배나 우상숭배 또는 미신척결의 이름 아래 단호하고 꾸준하게 시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발이나 저항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악마 척결을 정당화하는 데는 논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반면 불교와 유교를 비난할 때는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마련해야 했다. 비난받는 쪽의 반박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상당수 초기 신자의 개신교 입교는 선교사들이 기대하듯이 순수한 신앙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일반 민중들은 한 말 혼란기에 피신처를 구하기 위해 교회를 찾았으며, 양반 엘리트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혹은 근대문명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신교에 의지했다. 선교사들이 보기에 이런 입장은 순수 신앙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상당수 선교사는 서양인으로서 아시아인에 대한 우월감과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한국인 신자는 자신을 하인처럼 부리는 선교사의 고압적 태도에 강한 반발심을 느꼈다. 더구나 구국운동을 교회를 해치는 행위로 간주하고 금지하는 선교사들의 태도를 접하면서 선교사들을 친일 분자로 여기는 신도들도 생겨났다. 선교사와 일반 신자 사이의 갈등은 점차 증폭되었다. 1903년부터 시작하여 1907년에 절정에 이른 대부흥 운동에서 쌍방 사이의 증오심을 참회하면서, 이 갈등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그러나 1910년 선교사의 전횡에 반발하여 생겨난 대한예수교 자유교회, 1918년에 만들어진 조선 기독교회, 1923년 반선교 사적 자치를 선언하며 결성된 조선 자치교회 등의 사례는 선교사와 신자의 갈등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럼에도 선교사 위주의 지배체제가 계속 강고하게 유지되었고, 정교분리의 명분을 내세워 교회 내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자 많은 신자가 교회로부터 이탈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선교사 중심의 보수신앙 체제와 다른 신앙 노선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선교사 중심의 교회 활동과 다른 조선식 개신교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조선 민족의 고난을 일치시켜, 고통을 겪으면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서양의 기독교와 다른 동양적 기독교를 추구하는 사람도 등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도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합일적 사랑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19193.1운동은 당시 개신교를 지배하고 있던 탈정치의 순수 신앙 노선 체제하에서도 개신교도들이 마음속에 얼마나 민족 독립의 열망을 내재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물론 많은 개신교 지도자가 천도교와의 협력 및 정치운동이라는 이유로 참여를 거부했지만, 적지 않은 신도들은 적극적으로 3.1운동에 가담했다. 특히 보수 신앙의 요람지인 서북지방은 운동의 핵심이었다. 아무리 선교사들이 개신교의 절대성과 순수성을 이 땅의 개신교는 선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순수할 수 없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 개신교는 여러 가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동일시되었던 개신교와 서구 문명의 관계를 점차 분리해 생각하게 되었다. 근대문명을 이루는 데 개신교가 반드시 요청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이 시기에 근대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논의하는 내용이 많이 나타났다. 개신교는 근대과학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표명할 필요가 있었다. 점차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던 사회주의의 종교비판에 대응할 필요도 있었다. 개신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종교운동에 대해 개신교는 융통성 있게 대처해야만 했다. 1930년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교계에 충격을 주기까지 한국 개신교는 안팎의 여러 가지 도전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이면서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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