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자본가들은 다른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권력에 접근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인의 땅이었고, 조선 총독부의 모든 정책도 일본인 위주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총독부는 1910년 조선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여 조선 내 자본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통제하였다. 1915년에는 조선상업회의소령을 공포하여 한인이 독자적으로 설립한 상업회의소를 모두 혁파하고 한인 자본가들을 일본인 상업회의소에 강제로 병합시켰다. 이에 따라 한인 자본가의 독자적인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기구는 완전히 소멸하였다. 조선 회사령과 조선상업회의소령이 제정됨에 따라 한인 자본가들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철저히 순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살아남았거나 새롭게 등장한 자본가는 송병준, 송태관, 조중응, 한상룡, 백인기 등 친일 관료와 그 후예들, 그리고 조진태, 백완혁, 조병택, 박승직 등의 매판적 상인들이 주축이었다.
토지조사 사업이 일단락되고 쌀 수출이 늘어남에 따라 지방 지주들의 회사 참여도 지주, 고위 관료 출신, 매판 상인들이 상대적으로 대자본을 유지했지만, 지방 객주, 시전 상인, 중하급 관료 출신의 중소 자본가들은 급격히 몰락하는 양상이 빚어졌다. 총독부의 한인 자본에 대한 통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의 호황과 토지조사 사업의 완료 등을 배경으로 하여 1920년대에는 상대적으로 완화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인 자본가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회사령의 폐지는 일부 한인 재력가들에게도 합자를 통해 자본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집중적으로 그 혜택을 받은 것은 일본인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일본인의 투자가 급속히 늘어났고 일본 상품의 수입도 급증하였다. 한인 자본가들은 민족의식에 호소하여 물산장려운동 등을 주도하기도 하였지만, 정치권력의 보호가 없는 상태에서 성장의 기회를 찾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였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주인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일제하의 한인 자본가는 조연에 불과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노동자나 농민에 대해서는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여기에서 식민지하 한인 자본가의 이중적 성격이 배양되었다. 그들은 일본 자본에 의해 자신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는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일본 자본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자본가의 지위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주요 생산재를 일본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인 회사의 하청기업을 운영하는 조건에서, 이들은 일본 자본을 미워만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총독부 권력의 지원 없이는 노동자에 맞서 자신의 권익을 지킬 수도 없었다.
한인 자본가에게 새로운 활로가 열린 것은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였다. 만주를 식민지로 확보한 일본은 일본-조선-만주 사이에 새로운 분업 관계를 만들어 내려고 하였다. 일본을 중화학 공업과 정밀 기계공업 지대로, 조선을 경공업 지대로, 만주를 농업 지대로 하는 지역 분업 관계에 기반하여 엔 블록 경제권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산업자본의 조선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한인 자본가의 공장, 회사 설립도 많이 늘어나면서 한인 자본가 사이에서 종속적 발전에 대한 기대가 확산하여 갔다.
식민지 아래에서 한인 자본가에게 주어진 기회는 본래 제한적이었다. 자본이 진출을 꺼리거나 아니면 일본 대자본이 필요로 하는 하청 부문에서만 제한적으로 존립할 수 있었다. 발전 전망이 있는 부문에 독자적으로 진출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였다. 일본 자본이 산업을 독점하고, 일본 상품이 시장을 석권하는 가운데 한인 자본은 일본인 회사의 하청기업이나 일본 물자의 판매를 담당하는 기업에만 투자될 수 있을 뿐이었다.
한인 자본가는 일본 경제에 구조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본이 식민지 정책을 입안하면서 한인 자본가들의 처지를 고려할 이유는 없었다. 총독부의 정책은 철저히 일본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는 철저히 관치 경제가 유지되었다. 한인 자본가가 사업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총독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이들은 기생집과 요정에서 총독부 관리를 접대하고 일본인 자본가에게 아부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 스스로 일본인과 어울리기 위해서 일본인 못지않은 일본인이 되었다. 생활에서, 의식에서 그들은 일본인이 되는 것이 사업 성공을 위한 전제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일본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일본인이 보기에는 조선인일 뿐이었다. 식민지 조선 경제가 불구 적이었던 만큼 한인 자본가도 불구 적이었으며 식민지 조선 경제가 예속적이었던 만큼 한인 자본가도 예속적이었다. 이러한 성격은 독립운동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면에서 부정할 수 없었다. 정치적 독립에 대한 기대는 버리지 않았지만, 경제적 독립은 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일본 자본이 없는 자본주의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독립을 바라되 자본주의적 질서가 유지되는 독립을 원하였다. 그들이 익숙해 있는 자본주의는 다름 아닌 식민지 자본주의였다.
식민지 자본가들은 자본주의 질서를 찬미하는 사회진화론의 신봉자였다. 그들에게 세계는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냉엄한 원칙이 작용하는 경쟁의 무대였다. 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은 곧 돈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독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길러야 했다. 1930년대 이후 예속적 발전의 가능성이 눈에 보이면서부터 이 논리는 일본에 대한 의존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한인 자본가가 일본 자본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화할수록 그들은 의식적으로 일본에 종속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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