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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남북한 분단국가의 수립

by 영동신사 2024.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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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남한의 모든 정당과 민중이 단독정부 수립 여부를 결정하는 선거를 반대했으나 19485.10선거를 밀어붙였다. 선거에는 이승만, 한민당만이 참여했고 김구, 김규식 등은 참여하지 않았다. 경찰, 우익 청년단, 공무원들은 선거를 성공시키려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쌀 배급표를 주지 않는다거나 빨갱이로 모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선거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공정한 선거 절차는 무시되었고 선거 당일 투표소 주변에는 국방경비대, 경찰, 우익 청년단 등이 지키고 서 있었다. 5.10 단독 선거로 만들어진 제헌 국회는 무소속이 가장 많았다. 제헌국회 의원 대부분은 이승만, 한민당과 이들에게 우호적인 세력이었다. 제헌국회는 헌법을 만들고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뽑아 대한민국 정부를 세우는 주춧돌을 놓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된 정부가 아니라 동강이 난 반쪽만의 정부였다. 더구나 제주도 민중항쟁은 그칠 줄 몰랐고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여수, 순천 지방을 점령하였다. 군대가 여순 봉기를 진압하였지만 남아 있는 세력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유격 투쟁을 시작하여 남한 단독정부를 위협하였다.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도 같은 해 825일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거처 9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체제를 달리하는 남북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6년 한국에는 미소 합의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19475월 다시 열린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참여 대상 문제로 8월에 휴회 되었다. 이에 미국은 한반도 남쪽만이라도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기로 하였다. 미국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정책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이미 남한을 점령할 때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 정부를 수립한다는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정 때문에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 되자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유엔에 한국 문제를 넘겼다. 유엔은 19471114일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194818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남한에 들어왔으나 소련과 북한은 북한에 입국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할 수 없게 되자 유엔 소총회는 226일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유엔은 남한 단독선거를 인정하여 단독정부로 가는 길을 닦아 놓았다.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안에서도 이 결정은 한국을 영원히 분단시키는 것이고 남한의 정치 분위기마저 선거를 자유롭게 실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활동을 끝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된다는 소식은 해방 뒤 자주 국가를 꿈꾸어 왔던 민중에게 날벼락이었다.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권이 세워지고, 민족이 나뉘고, 국토가 반쪽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직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만이 단독선거를 찬성하며 발 벗고 나섰다. 194663일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이승만은 19477월에 한국 민족 대표자 대회를 조직하여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운동을 본격적으로 밀고 나갔다. 남로당은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반대 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남북을 점령하고 있는 미국과 소련 두 나라 군대가 철수한 뒤 외세를 물리친 상태에서 우리 민족의 힘으로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결사반대,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 즉시 철수 등을 내건 2.7 구국 투쟁이 발생하였다. 투쟁은 영등포 노동자들의 총파업에서 시작되어 농민, 사무원, 학생, 시민들의 궐기로 이어졌다. 민중은 시위, 집회, 동맹 휴학, 봉화 투쟁, 삐라 살포 등의 방법으로 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벌였다. 투쟁에 참여한 사람의 수는 147만 명에 이르렀고 검거된 사람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27일부터 10일까지의 집중적인 투쟁 기간이 지난 다음에도 단독 선거 반대 투쟁은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계획적이며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단독 선거, 단독 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은 제주에서 가장 치열하게 타올랐다. 제주에서는 19473.128주년 기념 제주도 대회에서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다음 해 4.3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주 민중이 4.3일 이후 거세게 투쟁을 벌이자 미군정과 우익 청년단체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민중을 탄압하여 수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한편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여러 정치 세력은 남북 연석회의에 모두 모였다.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안에 북한은 남북의 여러 정치, 사회단체를 포함하는 연석회의를 제안하여 평양에 모였다.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김일성, 박헌영 등 정당과 사회단체 659명은 미국과 소련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1945년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일제가 남겨두고 간 유산을 청산하고 반봉건적 여러 제도를 철폐하여 통일된 민족 국가를 만들려는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단독 정부가 세워지고 말았다. 김구나 김규식 세력까지도 배제한 채 수립된 단독정부는 친일파를 척결하기는커녕 그들을 감쌌고 농민들이 바라던 토지개혁을 반대하면서 지주의 이익만을 보장해 주었다. 미국은 남한에 친미 정권을 세우려고 단독 정부 수립을 적극 도와주었다. 남한에 단독 정부가 수립된 것은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민족의 과제와 경제적 구조를 개혁하려는 민중의 과제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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