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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by 영동신사 2024.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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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고, 적극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국민의 사회가 정착되어야 하였다. 일본 당국은 조선을 개항시킨 직후부터 자국민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도모했다. 개항장에 거류지를 두어 상인들에게 안전과 생산 활동을 보장해 주는 한편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권력과 군대의 힘이 뒷받침되었다. 조선에 대한 각종 경제정책 및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한 토지의 확보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에게 식민지는 새로운 사냥터이자 개척지였다. 대량 이익을 보장하는 시장을 찾아 나선 상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새로운 경제 체제 속에서 생활권을 확보하지 못한 일본인들에게 식민지는 새로운 삶을 보장해 주는 장소였다. 권력의 뒷받침과 일본인 사이의 이해가 결합하면서 일본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1910년 이후 조선총독부 체제가 확립된 뒤 일본인의 주류는 식민지 관료, 군인, 기업의 중견 엘리트로서 형성되기에 이르렀고 식민지 권력을 정점으로 하여 조선인 사회 위에 군림하는 식민자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 식민자 사회는 지배권력의 폭력 장치인 군대를 배후의 힘으로 삼아 성립되고 유지되는 군대 주도, 관료 우위의 세상이었고, 군인과 관료의 천하였다. 경제의 담당자도 한탕을 노리는 모험 상인에서 권력과 밀착한 독점 재벌로 바뀌었다. 특권적 회사원 등의 엘리트 식민자가 정(町)이라 불리는 도시의 일본인 타운에서 부유하고 우아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일본인의 살림살이는 대체로 넉넉했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일본인은 식민지를 언제나 가난한 땅으로, 조선인을 늘 불결한 존재로 인식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에 상륙했을 때, 조선이 이미 그런 상태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가져보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조선의 일본인 사회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통치 권력과 깊은 관련 속에서 구축된 사회였다. 자연히 통치 권력과의 유착 관계가 매우 강했다. 일본은 조선에서 1910년대 이전부터 이미 각종 농업회사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들의 경작지를 마련해 주었고, 관세를 통제해 경제적 이득을 강화해 주었다. 학교 용지를 마련해 일본인의 교육에 도움을 주었으며, 지방제도 정비를 통해 일본인 거주지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인 거주지에는 도로와 전기, 수도 등 인프라가 마련되었고 일본 상품을 판매하는 상가가 형성되어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 대신 일본 당국은 거류민단 법을 통해 제도적으로 일본인 사회를 통제하고, 지배 정책의 토대로 삼는 데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사를 조성하고 교육과정과 각종 종교를 통해 일본인의 정신적 통제도 조선총독부의 주요한 업무였다.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 식민지에 거주하는 자국민은 보호해 주어야 할 존재이면서도 지배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협조 세력으로 역할을 담당해야 할 대상이었다. 일본인이 식민지에서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식민 통치를 지지하는 역할을 해 준다는 것은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매우 긴요한 일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인 거류지에 위생 조합을 만들고 학교를 세우며, 거리를 조성하고, 상하수도를 설치한 것은 오직 일본인을 위한 노력이었다. 조선인과 거주 구역을 구분하여 철저히 다른 세계를 형성했다. 일본인 사회가 조선 사회와 공존하고자 하는 노력이나 의도는 찾기 어렵다. 조선총독부가 늘 부르짖던 일선 동화의 목소리도 찾기 쉽지 않다. 당시 일본인에게 식민지 조선은 조선 민중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공간이 아니라 식민지 그 자체였다. 식민 본국이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착취를 행하는 곳, 식민지 조선인의 삶과 구분되고 분리되어 그들 위에 군림하는 삶을 보장해 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은 속지주의에 의해 참정권을 잃은 일본인들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다주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에서의 생활은 보잘것없던 본국에 생활 대신 화려한 지배자의 삶을 보장해 주었으나 본국과 유리되는 과정은 피할 수 없었다. 관료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는 기회는 적어지고 있었고, 상인에게도 본국은 당시까지의 부를 누릴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시기가 지나면서 일본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고 조선에서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더라도 본국인과 같이 일본 국민으로서 사회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도 희박했다. 일본인이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이 조선임이 좀 더 분명해지면서 식민지 조선 사회에 대한 일본인의 집착은 더욱 강해졌고, 이는 경제적 착취와 차별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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