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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단발령의 성격

by 영동신사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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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은 18951115일 공포되었다. 단발령이 공포되던 날 새벽 고종과 태자는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와 내부대신 유길준 두 사람의 머리를 강제로 깎는 퍼포먼스를 연출하였다. 모범을 보인다는 이유였다. 다음 날 1116일에는 관료들이 머리를 깎았다. 서울에서는 경무사 허진의 지휘 아래 순검들이 길거리에서 강제로 사람들의 상투를 잘라냈으며, 각 관찰부에 상투 자르는 관리를 파견하여 날을 정하여 머리 깎을 것을 독촉했고 경무관과 순검들로 하여금 강제로 머리를 깎게 하였다. 이어서 양력 사용, 연호 사용, 복색 제도 개혁 등에 관한 조칙이 내려졌다. 해당 조칙에서 고종은 짐이 머리카락을 잘라 신민에게 모범을 보이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받들어 만국과 함께 병립하는 대업을 이루게 하라고 하였다. 같은 날 유길준은 내부 고시를 통해 고종이 대 분발하여 단발에 관한 조칙을 내렸으며, 위생에 이롭고 일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 표준을 보였고, 국가와 백성의 부강을 도모하고 정치개혁을 도모하기 위해 솔선하여 시행하였다고 했다. 이때 단발과 함께 망건도 폐지했다. 조칙에서는 상투와 망건은 원래 우리에게 없던 것으로 고유의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일하기 불편하고 양생하기 불리하며 배와 자동차가 왕래하는 오늘날 홀로 쇄국하던 구습을 지킬 수 없다. 백성이 부강하고 군대가 강하지 않으면 선왕의 종사를 지키기 어렵다. 복색을 바꾸고 단발하는 것은 백성의 이목을 새롭게 하고 구습을 버리고 유신하는 정치에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머리카락과 구습을 함께 잘라낼 것을 요구하였다. 단발을 강제하는 측에서 내세운 논리는 편리함, 위생, 새로운 시대의 자각, 다른 나라들과 동등해지기, 개혁의 다짐 등 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강요된 불평등 조약 체제를 극복하고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 대륙 침략과 조선 침략을 구상했다.

1876년 조선에 강화도 조약을 강요한 이후 일본은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변화시키려 했다. 일본은 청나라의 영향으로부터 조선을 분리하려 했고, 이를 둘러싼 청일 양국의 대립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일본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을 주도하게 되었다.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은 곧 조선 침략으로 이어졌고, 조선에 내정 개혁을 강요했다. 일본은 조선 침략과 내정 개혁의 강요를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자주독립시키는 것, 근대화를 돕는 것으로 포장했다.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일본은 1894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동시에 청나라와 연결되어 있던 민 씨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명성 황후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정치 세력들이 러시아, 미국 등과 다시 손을 잡게 되었고, 러시아는 3국 간섭을 주도하여 일본이 조선에서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은 친러 배일 정책을 추진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수립된 친일 개화파 정부는 자주독립 사업과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그것이 18961월부터 건양이라는 연호 사용, 양력 사용으로 구체화 되었고 단발령으로 상징되었다. 강제 단발은 교통 요지에서 길을 막아 사람들의 통행을 중지시킴으로써 서울 성안의 생활필수품 공급을 중단시켰으며 상업 유통을 방해했다. 심지어 외국과의 교역까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국 각지에서 단발 반대 상소 청이 만들어졌다. 단발 반대 상소와 통문이 나돌자 정부는 즉각적인 조처를 했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 단발 반대 의병이 봉기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89614일 최익현이 포천에서 거사를 시도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춘천, 제천, 여주, 이천, 광주, 홍주, 안동, 진주 등 이제까지 널리 알려진 의병 봉기지역 외에도 경기 동북부 지역의 포천, 양평, 마전, 연천, 가평, 강원도 철원, 화천, 양구, 금화, 회양, 평강, 함경도 모든 지역, 영동 9군을 관할하는 강릉부, 호남의 나주 등지에서 단발 반대 의병이 봉기했다. 단발 반대 의병은 단발을 거부하는 데 머물지 않고 단발령을 강행하는 관리 특히 경찰 관리를 공격하여 단발령을 중지시키려 했다. 심지어는 단발한 사람까지 공격하였다. 의병들은 고종과 태자의 강제 단발을 명성황후시해사건 못지않은 변괴라고 생각했다, 상투 자르기는 일본에 굴복하는 것, 국가의 명맥이 끊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문명이 변하여 야만이 되고 사람이 변하여 오랑캐나 짐승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인의 전통, 도학의 명맥, 역대 선왕의 예절과 문물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천지가 번복되고 암흑세계가 되는 일이 바로 단발령이라고 인식했다. 이들은 국모의 원수를 갚고 국왕의 치욕을 씻는 일도 중요하지만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이 임금과 신하의 의보다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부모의 유체를 보전하고 선왕의 법복을 지키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18962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고종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고, 친일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였으며, 의병 참여 세력의 일부인 친러 개화파가 집권했다. 18951115일의 단발령이 조칙으로 취소된 것은 1897812일 대한제국 출범 직전이었다. 단발령 취소와 함께 유인석과 노응규 등 단발 반대 의병 세력에 대한 사면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단발령은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민심이 극히 흉흉해진 가운데 집권 세력이 점차 불리해지자 그러한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취해진 무모한 시도였다. 명성황후시해사건도 무마하고 근대적 개혁도 추진할 수 있다면 친일 개화파는 정권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고 일본은 명성 황후 살해라는 국제적 범죄를 감출 수 있다. 단발을 반대한 의병들이 명성황후 시해를 복수하고 목숨 걸고 머리털을 지킨다는 것은 근대의 저항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중화 문명이었고, 소중화였으며 개혁에 의해 무너진 성리학적 질서였다. 당시 의병들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1880년대 이미 무너진 중화 체제를 계속 고집하며 중국에 의존하려 했으며 근대사회로의 발전에 따라 무너진 성리학적 질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복고적 흐름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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