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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우리나라 근대 신문광고의 전개과정

by 영동신사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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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상업광고는 광고주가 신문, 잡지, 라디오, TV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아이디어, 상품, 서비스 등을 유료로 제공한다는 내용을 알리는 일을 말한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상품을 만드는 일보다 파는 일이 더 어렵게 되었을 때, 상품을 어떻게 판매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을 때, 진정한 의미의 광고가 탄생하였다. 이 단계에서 상품을 구매해 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그 연구 성과에 광고도 포함되었다. 광고란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인위적으로 사회에 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기에 시작된 광고도 공익광고, 안내광고, 분실 광고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나 상업광고가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며 광고의 발달을 이끌어 갔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량 생산된 공장제 상품이 판매되기 시작할 무렵에 상업광고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서양의 공산품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었는데, 이 상품들을 수입하고 판매하던 회사나 상점이 신문에 영업 광고를 게재하였다. 최초로 근대적인 상업광고가 실린 신문은 1886년 2월 22일 한성주보 제4호에 실린 독일 상사 세창양행 광고였다. 당시 세창양행은 동물 가죽, 담배 등의 농업생산물을 조선에서 가져가는 대신 서양 직물 등 각종 공산품을 수입 판매하였다. 신문광고가 민간에 널리 알려지고 정착하게 된 것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민간 신문 독립신문의 역할이 컸다. 독립신문의 지면은 전체 4면이었는데, 독립신문 창간호는 3면에 광고를 9건 싣고 있다. 1899년 12월 4일 자로 폐간될 때까지 광고를 보면, 업종별로는 잡화상점 광고가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서적 광고였다. 그 밖에 은행설립을 위한 자본금 모집 광고, 분실 광고 등이 자주 실렸다. 독립신문이 폐간된 뒤 1900년을 전후하여 창간된 여러 민간 신문을 통해 광고는 빠르게 확산하였다. 이즈음 광고 찬반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찬성론은 여러 가지 근대적인 제도를 받아들여 적극 이용함으로써 문명개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으로 광고의 적극적인 도입과 활용을 강조하였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당시 신문의 상업광고주가 대부분 외국인이고 외국 상품의 확산을 촉진하는 내용이므로 결과적으로 조선 경제의 대외 종속을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개항기에 도입된 상업광고에 대하여 여러 측면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광고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모든 민간 신문을 폐간시키고 매일신보만을 조선어로 발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다가 3.1운동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조선어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일본상품의 소비시장으로 전락한 조선의 처지는 조선어 신문의 광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형식 면에서는 다양한 광고 기법이 개발되었다. 점차 도안이나 그림 사진을 넣는 것을 물론이고 퀴즈식 연속광고 등 여러 형태의 광고가 등장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신문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한 상품은 약품, 화장품, 비누, 서적, 담배, 치약, 맥주, 구두, 양복 등이었다. 상품광고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품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 판매를 증가시키고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에 가장 흔했던 것 중의 하나가 약 광고였다. 오늘날과 달리 뚱뚱한 몸, 남자의 튀어나온 배는 건강과 사회적 성공의 상징이었다. 이 밖에도 정력제, 영양제, 은단 등을 선전하는 경우가 많았고 성병 치료제, 여성 대상 화장품 광고도 다수를 차지하였다. 당시 여성은 여전히 남성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였지만 모던 걸(신여성)이 등장하고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것이 나타나면서 부분적이나마 여성이 중요한 상품 소비자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는 현실을 광고가 반영하였다. 담배 역시 자주 광고에 등장한 상품이었다. 개항 이후 외국산 궐련 초의 수요가 증가하자 이를 바탕으로 1890년대 후반에는 경성에도 연초 제조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대에 연초제조업은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고 규모가 큰 제조업이었다. 담배 외에도 근대적인 상품으로서 자주 광고란을 장식한 상품이 구두, 양복이었다. 이런 상품들은 근대화, 서구화된 신사와 숙녀에게는 필수품이었기 때문에 광고와 잘 어울리는 상품이기도 하였다. 또한 조미료나 포도주처럼 소수에게 한정되기는 했으나 식생활의 변화를 주도하는 상품들도 광고란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서구화된 상품의 소비 증가와 별개로 식민지라는 조건은 조선 사람은 조선 물건을 쓰자는 취지의 조선물산장려운동 같은 것을 촉발하기도 하였다. 화장품 박가분은 당시에는 흔히 접할 수 있었던 화장품 광고였는데, 조선 여성을 주 고객으로 삼는 화장품답게 물산장려운동의 이념을 내세워 광고 효과의 극대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화장품이나 비누가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면 치약 광고는 흡연으로 인해 이가 누렇게 변색한 남성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처럼 당시에도 화장품 및 위생용품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장 넓은 광고시장을 형성하였다.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였던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광고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맥주는 대한제국 말 이래 자주 광고에 등장하였으며 서구식 문화생활을 상징하는 상품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아사히맥주 광고는 일본을 맹주로 한 아시아의 융성이라는 태평양 전쟁의 슬로건과 아사히맥주의 이미지를 연결하고 있다. 여기서 아사히(朝日)는 아침 해라는 뜻으로 떠오르는 해 일본제국이 아시아를 통합·부흥시킨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광고를 싣던 동아일보를 비롯한 조선어 신문들은 일제의 황민화 정책이 강화되면서 1940년대에는 모두 폐간되었다. 이후 조선은 일본제국주의가 벌인 침략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허영란의 글 신문광고에 비친 근대에서 발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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