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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미

by 영동신사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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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고 난 뒤 민 씨 정권은 보다 더 청나라에 기대면서 정권 유지 차원의 개화 정책을 펼쳐 나갔다. 동도서기 사상을 가진 개화파들은 민 씨 정권의 개화 정책에 참여했으나 그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조선 사회를 변혁하려는 움직임은 드디어 농민전쟁의 형태로 터져 나욌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 씨 정권은 어떤 형태로든 개혁을 더 이상 미루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농민군을 제압할 수 없었던 민 씨 정권이 1894년 4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기회를 엿보던 일본도 같은 해 5월 6일 군대를 파병하였다. 민 씨 정권은 농민군과의 합의(전주 화약)를 내세워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미 민 씨 정권을 타도하고 친일 내각 수립을 구상하고 있던 일제는 오히려 내정을 개혁하라며 민 씨 정권을 간섭하였다. 일본은 농민군이 해산했는데도 청나라에 함께 내란을 진압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이 진전될 때까지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자고 제안하였다. 청나라가 이 제안을 거절하자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벌일 구실을 찾는 한편, 조선 정부에 미리 짜놓은 내정개혁안을 들이밀면서 시행을 요구하였다. 이보다 앞서 민 씨 정권은 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일본이 내정을 간섭할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1894년 6월 11일 개혁 기구인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결국 6월 21일 새벽 일본군 혼성여단 2개 대대로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민 씨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친일 갑오정권이 수립되었다. 갑오정권에는 갑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1880년대 개화 정책에 깊이 참여하였던 동도서기 사상을 가지고 있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을 비롯하여 개화 정책을 통해 성장한 젊은 관료 출신의 김가진, 유길준 등이 참여하였다. 양반 지주 출신인 이들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권을 잡는 농민 혁명을 예방하려면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갑오정권에 참여한 개화파는 이전부터 추진하고자 했던 개혁안을 중심으로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일부 수용하여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김홍집, 이준용 내각이 출범한 1894년 6월부터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유길준 내각이 무너질 때까지 내각이 6차례나 바뀌었다. 먼저 봉건적인 전제군주제 아래에서 구별되지 않았던 국정과 왕실 기구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의정부는 서양의 제도를 참작하여 6조의 명칭을 내무, 탁지, 군무 등 8아문으로 바꾸었다. 이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제도개혁이었다. 또 왕실과 국가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하여 민중의 불만과 저항을 무마하였다. 관리임용제도를 개혁하여 봉건적 신분 질서에 기반을 둔 과거제를 폐지하고 인물 본위의 채용으로 바꾸었다. 경제개혁도 단행하였다. 은본위의 화폐제도를 실시하여 신식화폐를 발행, 유통했으며 외국 화폐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일본 화폐가 국내에 유통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 일본이 조선의 금융권과 상권을 지배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갑오정권은 법적으로 문벌과 양반, 상놈의 신분제를 타파했으며 공·사노비를 폐지하였다. 과부 재가 금지나 연좌법 같은 사회폐습을 폐지하는 등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갑오정권의 개혁안은 갑신정변의 정강이나 농민군의 안을 상당한 부분 받아들였다. 형식적 측면에서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봉건적 토지제도를 고칠 개혁 방안을 마련하지 않았다. 민중의 이익보다는 지주의 입장을 옹호하는 개혁 방안이었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드러내 놓고 내정을 간섭하면서 개혁 방향을 바뀌어 갔다. 1894년 12월 김홍집, 박영효 내각이 들어서면서 개화파 정권의 친일적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1895년까지 2차 개혁(을미개혁)이 실시되었다. 2차 개혁에서는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일본식 궁내부 제도와 내각제도를 도입한 것을 비롯하여 지방제도, 군사제도, 사법제도, 교육제도, 각급 정부 기관의 정비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발표된 개혁안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차관 도입이 무산되면서 실시되지 않았다. 나라 안팎의 정세변화와 맞물리면서 2차 개혁안은 그야말로 구상에 그치고 말았다. 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봉건적 사대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주적 국가 주권의 확립이라고 파악하면서도 이것이 국가 주권의 또 다른 종속적 편입을 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의 주관적 애국 사상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의 창구로 바뀔 여지가 많았다.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은 이들의 중요한 한계였다. 갑오개혁은 조선이 봉건사회를 벗어나 근대사회로 나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겉모습은 담고 있었다. 그러나 개화파는 개혁을 뒷받침하는 민중의 역할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않고 일본에 의지하였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힘입어 성립한 갑오정권은 개혁 정치의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면서 일본에 예속되었다. 갑오정권 말기인 제3차 김홍집 내각 때는 민비시해사건의 처리를 둘러싸고 그 진상을 숨기기에 바빠 일본의 범죄행위에 가담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마저 저버리는 한계를 드러냈다. 전국이 반일 의병 봉기로 들끓는 가운데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이완용 등이 친러내각을 세우자, 갑오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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