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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1920년대 일제의 문화정치와 민족개량주의

by 영동신사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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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서 드러난 조선 민중의 저항을 확인한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면서 기만적인 유화정책으로 전환하였다. 19198월 조선 총독으로 임명된 해군 대장 사이토는 부임하자마자 치안유지, 교육 보급 개선, 산업개발, 교통·위생 정비, 지방제도 개혁 등을 시정방침으로 내걸고 소위 문화정치를 펴나갔다. 일제는 악명높던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었다. 이것은 경찰업무와 군사 업무를 나눈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경찰관서와 경찰의 수를 1918년 각각 551개소, 5,400여 명에서 192022,761개소 18,400여 명으로 3배 넘게 늘렸고, 경찰경비도 1918800만 원에서 19202,394만 원으로 3배나 늘려서 총독부 예산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실제로는 반일 운동을 효과적으로 탄압하려고 경찰과 군대를 더욱 강화하였다. 또 일제는 11 경찰서, 11주 재소 제도를 확립하고 특고형사, 사복형사, 제복 순사, 밀정 등을 편성하였다.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1925)을 만든 것도 이때였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였다. 그 결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조선인 신문이 발간되고 여러 사회단체도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단재 신채호가 검열, 압수, 모든 압박 중에 기계, 신문, 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 목탁으로 자명하여 강도의 비위에 거슬리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 발전의 과정으로 본다면, 그 문화 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고 꼬집었듯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한 위에서만 가능하였다. 일제는 문화정치의 본질을 숨긴 채,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일제는 조선 민족이 열등하다고 널리 교육, 선전하여 우리 민족에게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강요하면서 식민지 노예로 길들이려 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기만적인 문화정치를 미끼로 삼아서 3.1운동 후 흔들리던 조선인 대지주와 자본가, 지식인 등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상층부를 식민지 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여 민족을 분열시키려 하였다.

일제는 친일 분자를 귀족, 양반, 부호, 교육가 등에 침투시켜 여러 친일 단체를 조직케 할 것, 친일적인 민간 유지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 교육의 이름으로 조선 청년을 친일 분자의 인재로 양성할 것, 조선인 부호 자본가에 대해 일본 자본가와 연계를 추진 할 것 등의 6가지 친일파 육성 방침을 내세웠다. 식민지 지배를 인정한 위에서 조선인이 실력을 기르면 먼 훗날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문화정치의 본질은 곧 조선 독립 불가론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인 대지주, 예속 자본가, 지식인 등 많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상층부는 1920년대 문화정치에 발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제가 실시한 회사령 철폐(1920), 산미증식계획 등 식민지 경제정책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개량주의 운동을 벌여 나갔다. 3.1운동 뒤 일제가 문화정치를 펼치면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은 민족개량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분화되었다. 조선인 대지주, 자본가와 일부 지식인들은 3.1운동이 좌절한 뒤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내건 문화정치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경제적으로는 실력을 기르고, 사상적으로 민족성을 개조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치권을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1924년 무렵 민족 독립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자치론을 주장하였다. 이광수는 동아일보 신년 사설로(192412~6) 민족적 경륜을 실어 독립운동을 일본이 허용하는 자치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일본의 주권 아래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산업진흥과 교육 개발로 민족의 실력을 기르자고 하였다. 실력양성론에서 자치론으로 이어진 민족개량주의는 실제로 민족 독립을 포기한 친일의 타협 노선이었다. 사회주의 운동 등과 대립하면서 민중을 기만한 민족개량주의는 민족해방운동의 열기를 식히려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이바지하였다.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의 다른 한편에서는 신석우, 안재홍, 백관수, 이상재 등이 비타협적 민주주의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들은 문화정치의 기만성과 민족개량주의의 거짓됨을 폭로하면서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투쟁하는 길을 찾았다. 그리하여 1920년대 말 사회주의 세력과 힘을 합쳐 신간회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 초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실력을 양성한다면서 여러 운동을 벌였는데, 물산장려 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대표적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이 퍼져 나가면서 그 피해가 노동자, 농민 등 절대다수의 소비자인 식민지 민중에게 집중되었다. 민족산업과 생산력이 매우 보잘것없던 식민지 경제 상태에서 광목, 모자, 고무신 등의 생필품은 금방 바닥이 나고 가격도 치솟았다. 원산지에서 한 필에 160~70전 하던 원목이 상점에서는 3원 안팎의 가격에 팔렸다. 이 운동에서 나오는 이익은 상인이나 자본가 계급의 몫이었고 그만큼 노동자, 농민 등의 민중은 피해를 당하였다. 또 이 운동을 주도하던 조선물산장려회에 박영효, 유성준 같은 친일파나 친일 관료들이 적극 참여하였고, 국산품 애용의 슬로건도 일본상품 배척으로는 이어지지 못하였다. 일제와 타협하는 민족 개량의 성격이 드러나면서 초기에 참여했던 이상재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떨어져 나오고 민중이 외면하여 물산장려운동은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운동은 조선인 기업의 힘을 키워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지만, 자산가 계층의 이익을 민족 전체의 이익으로 여긴 한계를 지녔다. 아직 민족주의 세력이 완전히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이 운동에 처음에는 민중이 깊은 관심으로 가지며 지지를 보냈다. 민족주의자들은 반일 운동의 차원에서 문화정치의 열린 공간을 이용하려고 이 운동에 참여했지만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이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3.1운동 뒤 고조된 반일 운동을 문화운동에 묶어두려 하였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도 처음에는 대중의 호응을 받았지만 오래지 않아 대중이 이탈하였다. 식민지 수탈 체제 아래 일부 자산가 계층의 자녀들을 빼고는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 운동은 시급한 것은 과다한 문맹 인구를 퇴치하기 위한 대중 교육의 실시이며 고등교육은 그다음이라고 비판받았다. 실력양성운동은 반일 성향을 지닌 사회운동을 통제하려던 일제의 속셈과 민중, 사회주의 운동의 힘을 누그러뜨려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주도권을 잡으려 한 민족개량주의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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