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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서양 과학기술 도입의 빛과 그림자

by 영동신사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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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활 어느 분야에서도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아직도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 과학주의와 국가 경쟁력의 강화를 위해 엘리트 위주의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는 경제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여기서 한번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전기가 처음 등장하여 자리 잡아가는 과정은 나라마다 서로 달랐다. 미국의 경우 전축, 라디오, TV 등 각종 전기제품이 보급되면서 대중문화가 크게 변화되었다. 춤과 노래, 파티가 대중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새로운 오락과 여흥 거리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서구사회의 모습과는 달랐다. 우리는 개항 이후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도입된 전기는 서구사회와 같이 풍요를 약속하지 않았다. 식민지화, 근대화, 자본주의화, 산업화의 역사 속에서 전기를 비롯한 서구 과학기술의 도입은 일찍이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전봇대와 전깃줄을 처음 본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선은 1885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개통되었다. 전신 시설은 전봇대의 확보 등 설치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며 관리에도 애로점이 많았다. 실제 전신은 일반 사람의 생활에 별반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반면에 논과 밭을 가로질러 함부로 설치된 전봇대와 전깃줄은 성가신 것이었고, 전봇대용 나무의 공출과 부역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더욱이 일제의 손아귀에 있는 전신 시설은 동학군과 의병을 탄압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결국 개항 이후 이 땅에 들어 온 전신은 결국 파괴하고 싶은 대상이 되고 말았다. 1898년에 개통된 전차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고종과 양반 관리, 지식층들은 전차가 매우 실용적인 문명의 이기라고 생각했으며, 개화 사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전기기술에 관련된 인적, 물적 자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국내 산업과 경제활동에 대한 아무런 고려도 없이 전차라는 서구 첨단기술을 도입하였다. 실제 전차가 개통된 지 4~5년이 지난 후에도 전차는 서울 시민들에게 실용적인 운송수단이라기보다는 흥미롭고 신기한 오락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정부가 기대했던 상공업 진흥에 기여하는 기간산업으로 자리 잡지도 못했다. 이것은 전차 사업이 전차 부설과 그 운영에 따르는 제반 문제, 국내 산업과의 연관성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서구 첨단시설의 편리함과 상징성에만 매달린 채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1902년 처음 공중용 시외전화가 설치되었다. 이때 전화 가입자는 총 24명이었고 그중 조선인을 2명에 불과하였다. 전화는 처음 몇 년 동안의 사용 권장에도 불구하고 가입 신청자가 크게 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전화 통화 자체를 어색하게 여겼다. 전화는 전통문화와 갈등을 빚으면서 20~30년이 지난 후에야 상공인을 중심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전화가 우리 생활과 문화에 파고들기 위해 시작할 무렵, 라디오가 처음 등장했다. 당시 라디오는 전파를 이용해 무선으로 음성을 전달한다는 점 때문에 무선전화로 불렸다. 라디오 방송은 1927년 처음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은 라디오를 참으로 가공할 과학의 발달로 인식하였으며, 이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식민지의 어두운 현실에서 특별한 오락과 여흥 거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서구의 과학기술 문명은 선망과 동경의 대상을 넘어서 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환각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조선인들에게 전화와 라디오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1924년 서울의 전화 가입자 수 총 5,969명 가운데 일본인이 4,875, 조선인 951, 외국인 143명으로 일본인이 전체의 82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이것을 인구 비율로 나눠보면 1천명당 일본인은 60대 정도, 외국인은 37대지만 조선인을 5대 밖에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전기의 경우, 1940년에 이르러서야 조선인 총가구 420만여 호 가운데 겨우 10퍼센트 정도만 전기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이때 한국의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던 일본인 가구 18만 호는 100퍼센트 전깃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민족적 차별뿐만 아니라 문화적 소외감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일제가 떠들어 댄 조선의 문명화란 결국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의 문명화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었다. 조선인은 문명화된 일본인의 생활을 멀리서 지켜보는 소외된 존재로 전락하고 있었다. 20세기 초반 과학기술은 우리 민족에게 때로는 환희, 때로는 절망의 대상이었다. 봉건왕조와 양반 관리들에게 전신, 전화를 비롯한 전등, 전차, 라디오 등은 근대의 상징이었다. 전등의 찬란한 불빛과 소리가 들리는 상자는 감탄과 경이의 대상이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편리함과 실용성에 찬사를 보냈으며, 이것들이 문명화된 세상을 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땅의 민중들에게 과학기술은 그다지 효율적이고 편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직 봉건적이고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에 제국주의자들이 이식한 과학기술은 실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것, 단지 이질적인 문화의 하나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1910~20년대 신문에서는 과학 문명의 시대가 열렸다고 떠들었지만 이것을 누리는 계층은 극소수였고 오히려 대다수 사람은 문화적 상실감과 소외감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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