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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국 도입기 전개과정 영화평론가 김소영은 영화 공부를 통해 영화를 잉태하고 성장시킨 현대의 한 특정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고, 역으로 모더니티를 이해하면 영화라는 매체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근대의 자식인 영화는 그 모태인 근대사회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그것 자체를 형성시킨 중대한 매개체였다. 서구에서는 1895년을 영화 탄생의 해로 친다. 영사기와 필름을 둘러싼 오랜 발명의 역사 끝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찍은 짤막한 필름을 대중 앞에서 유료로 상영한 것이 바로 1895년이었다. 우리나라에 영화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99년으로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가 영사기와 활동사진을 들고 와서 고종 황제와 신하들 앞에서 상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3년경에는 서울 장안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설 유료 상영이.. 2024. 3. 3.
프랑스의 반혁명과 우파 센강은 파리를 좌우로 나눈다는 말처럼 프랑스에서 좌파와 우파는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이구분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다.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 자체가 프랑스 혁명기에 태어났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자면,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을 계승한 그룹이 좌파이고 그 반대가 우파이다. 프랑스 우파의 뿌리는 반혁명이다. 반혁명은 단순히 혁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쳐부수려는 정치적 움직임을 가리킨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은 혁명의 오류를 시정하라고 주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구체제로의 완전한 회귀 또는 왕정복고를 요구했다. 반혁명은 18세기 말에 절정에 달했던 귀족주의 문화의 재현을 희구하였다. 소위 구체제의 감미로운 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소리다. 혁명은 건전한 신체를 어느 날 갑자기 침범한 병이요,.. 2024. 3. 3.
현대 한국사 연구 동향 지난 50년간 한국 사학은 이념사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민족주의 사학일 수밖에 없었다. 식민주의 사학이 역사와 한국 역사 자체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식민주의 사학으로서의 현대 민족주의 사학 역시 그러기는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현대 민족주의 사학은 해방 이후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국가적 민족주의에 포섭되면서 탈역사화되기도 하였다. 물론 현대 민족주의 사학은 반식민주의 사학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한국 사상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 대두한 민중 사학은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역사학계에는 새로운 변화 양상들이 나타났다. 그동안 한국사와 한국 사학은 역사학.. 2024. 3. 2.
서산대사/사명대사와 임진왜란 조선 초기의 불교계 상황은 먼저 태조 때부터 도첩제를 시행하여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양반은 포 100필, 서인은 150필, 천민은 200필을 내야만 출가를 허락하는 강한 억제책으로 교단 운영의 기본 바탕이 되는 우수한 승려 자원이 크게 약화하였다. 이와 달리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불교 행사, 왕실의 제사, 사찰의 창건, 탑의 조성 등 불사는 지속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성립된 조선왕조는 고려시대에 광범한 영향력을 가졌던 불교를 강력히 억제하였고 이에 따라 불교 교단은 크게 위축되었다. 태종은 본격적인 불교 억제책을 펴서 1406년에 도문종 등 7종 242개만 지정하고 여타 사원과 승려, 사원에 소속된 토지를 줄이고자 하였다. 이듬해인 1407년 88개로 축소하고 승려를 환속시켰으며.. 2024.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