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한국 도입기 전개과정 class="layout-aside-right paging-number">
본문 바로가기
근현대사 주요 이슈

영화의 한국 도입기 전개과정

by 영동신사 2024. 3. 3.
반응형

영화평론가 김소영은 영화 공부를 통해 영화를 잉태하고 성장시킨 현대의 한 특정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고, 역으로 모더니티를 이해하면 영화라는 매체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근대의 자식인 영화는 그 모태인 근대사회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그것 자체를 형성시킨 중대한 매개체였다. 서구에서는 1895년을 영화 탄생의 해로 친다. 영사기와 필름을 둘러싼 오랜 발명의 역사 끝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찍은 짤막한 필름을 대중 앞에서 유료로 상영한 것이 바로 1895년이었다. 우리나라에 영화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99년으로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가 영사기와 활동사진을 들고 와서 고종 황제와 신하들 앞에서 상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3년경에는 서울 장안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설 유료 상영이 이루어졌다. 이 신기한 마술 장치가 서구로부터 한국에 도달하고 뿌리내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셈이다. 영화와 한국인의 만남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황성신문 1901914일 자에는 귀신의 조화 속 같은 물건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니 우리나라 사람은 어느 때에나 이런 묘술을 배워 익힐지 모르겠다고 적고 있다. 초창기 영화 흥행업은 미국이나 프랑스의 사업가들이 주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영미 연초회사인데, 이들은 담배 판촉사업의 일환으로 자기 회사에서 판매하는 담배의 빈 갑을 열 개 혹은 스무 개씩 가져오면 관람료를 받지 않고 무료로 입장시키곤 하였다. 활동사진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은 자못 열광적이었고 개화 지식인들 역시 영화를 열렬히 지지했다. 영화가 대중을 교육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 영화는 서구 국가들이 우리나라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 동시에 식민지적 근대를 형성시키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능했다. 우리에게는 영화가 귀신의 조화 속 같은 서양 근대의 얼굴처럼 받아들여졌다. 한국의 근대문화는 흔히 전통적인 요소가 잔존하면서 동시에 일본·미국·유럽적인 요소가 여러 층으로 뒤섞인 혼합물이라고 칭해진다. 그 흔적은 시대에 따라 영화 속에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영화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이래 오늘날까지 미국영화의 지배적 위치는 흔들린 적이 없었다. 동아일보 192612일 자에는 외국영화가 아니면 의지 못 하는 것이 조선 영화계의 십여 년 이래의 상황이다. 수입별로 보면 미국 영화가 구십 퍼센트로 유럽 영화 일 퍼센트에 비교해 보면 십팔 배가 좀 넘는다. 미국영화의 세력은 어느 때든지 변함이 없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 영화가 한국 사회의 대변동기에 끼친 문화적 영향이다. 당시의 논객 박광균에 따르면 그것들은 태반이 음탕스러운 놀이와 춤, 포옹과 키스, 화려한 도시, 진주 목도리, 으리으리한 저택 등 부르주아의 향락을 위한 장난감이었다. 그가 언급한 영화의 특징은 바로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의 외양과 풍습에 관한 것이다. 이런 영화들이 경성을 비롯해 전국에 흘러넘치고 민중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전통적인 연희나 오락 수단을 대체하는 흥행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미국식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으려면 20세기 초반, 영화가 이 땅에 상륙한 때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초기 영화사를 연구하는 것은 전통 시대로부터 자본주의로 급속히 이행하던 시기의 문화적 정황과 문화산업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 핵심 작업이 되는 셈이다. 어떠한 자생적 뿌리도 없이 철저하게 수입 문화, 수입 산업으로 시작된 영화가 한국 땅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또한 여기에는 과도기가 필요했다. 연쇄극이 그것인데, 무대에서 연극을 상연하는 도중에 실제 공연이 어려운 장면이나 풍경을 활동사진으로 만들어 중간에 끼워 넣는 형식이었다. 연쇄극 시대를 마감하고 본격적인 극영화 제작 시대를 연 것은 1923년에 나온 국경이다. 이 영화는 남녀평등권을 앞세우는 신여성이 방안에 국경을 둔 듯이 아내의 도리를 소홀히 하자 남편이 친구의 도움을 받아 아내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는 줄거리이다. 가정, 여성, 사랑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영화의 중요한 소재인데, 그 당시 영화들은 이런 소재를 신파조로 엮어낸 것이 대부분이었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근대화, 서구화, 도시화에 저항감을 느끼면서도 그 힘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신파극의 주인공들에 대해 당시 관객들은 눈물 콧물까지 흘리며 공감하였다. 가정, 여성, 사랑과 같은 문제는 전통 시대의 지배층이 정교한 담론을 통해 체제 유지의 중요한 축으로 활용했던 영역이다. 그런데 영화라는 뜻밖의 매체가 한 시대를 장악해 온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거세게 도전하면서 그것이 떠받치고 있던 봉건시대의 사회, 문화 전체를 근본에서부터 뒤흔들었다. 지배층 엘리트들이 신파극에 대해 두려움 섞인 경멸을 연신 쏟아부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본격적인 한국 영화의 전성기는 나운규와 함께 열렸다. 1924년 부산에서 한국인 최초의 영화제작사인 조선키네마가 설립되었다. 나운규는 여기서 만든 영화 운영전에 단역으로 등장하면서 처음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그가 2년 후에 발표한 아리랑은 최초의 대형 흥행작이자 문제작으로, 한국 무성영화 전성시대는 나운규와 함께 시작되어 1937년 그가 타계함으로써 막을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리랑으로 불붙은 영화 붐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935년에는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이규환, 최인규, 방한준, 전창근 등 유명 감독들이 등장해서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를 잇달아 발표했다. 아리랑과 함께 임자 없는 나룻배, 장화홍련전, 한강 등이 대표적이다. 1940년부터 영화계는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일제의 영화정책 때문이었다. 사실 일제는 처음부터 영화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이면서 한국 영화 산업의 성장을 방해하려는 정책을 꾸준히 강화해 왔다. 그러나 일제가 가장 주목한 것은 영화가 가진 정치적 선전효과였다. 그들은 1940년 조선영화령이라는 악법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영화를 국민 오락으로써 가장 중요한 위치와 함께 특히 선전, 보도 등의 현저한 기능을 영화계에 요구하였다. 실제로 1940년 이후에는 제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외한 그 어떤 영화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