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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프랑스의 반혁명과 우파

by 영동신사 2024.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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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강은 파리를 좌우로 나눈다는 말처럼 프랑스에서 좌파와 우파는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이구분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다.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 자체가 프랑스 혁명기에 태어났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자면,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을 계승한 그룹이 좌파이고 그 반대가 우파이다. 프랑스 우파의 뿌리는 반혁명이다. 반혁명은 단순히 혁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쳐부수려는 정치적 움직임을 가리킨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은 혁명의 오류를 시정하라고 주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구체제로의 완전한 회귀 또는 왕정복고를 요구했다. 반혁명은 18세기 말에 절정에 달했던 귀족주의 문화의 재현을 희구하였다. 소위 구체제의 감미로운 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소리다. 혁명은 건전한 신체를 어느 날 갑자기 침범한 병이요, 죄악이며 위대한 프랑스 역사의 난데없는 구렁텅이었다. 따라서 정상으로,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해 혁명 전체를 통째로 쳐부수어야 한다. 혁명은 비판이나 시정이 아니라 박멸하고 내쫒아야 할 대상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 인권에 기초한 새 세상의 출발점이 되기를 원했다, 또 모든 과거를 싹 쓸어버리고 절대적인 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목표였다. 프랑스 혁명의 이러한 본질에 근거하여 반혁명은 무에서 출발한 것을 다시 무로 되돌려야 한다고 외쳤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과 반혁명의 싸움은 귀족주의라는 구질서와 민주주의라는 새 질서의 결사전이었다. 타협이나 화해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였다. 혁명의 급진화에서 낙오하여 반혁명에 합류한 어제의 애국파들(입헌군주파, 푀양파, 지롱드파)를 반혁명으로부터 제외하자는 주장이 그래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반혁명 세력 역시 스스로를 정통파와 나머지로 엄격하게 구분했다. 반혁명이 본질적으로 귀족주의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혁명에 대한 민중 반란은 반혁명으로 별도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방데 반란은 처음에는 혁명을 지지했으나 국민국가의 증대하는 요구(종교와 징집 문제) 그리고 거만한 도시의 헤게모니에 반발한 일종의 농민반란이었다. 원래 절대왕권에 대한 귀족의 개혁 요구에서 비롯된 프랑스 혁명은 초기에는 반혁명 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절대왕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군주제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이런 방침은 루이 16세의 연설에서 천명되었다. 이 연설을 통해 루이 16세는 1789617일에 단독으로 국회를 구성한 제3신분의 결정을 파기하면서 개인적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과세에 대한 삼부회의 동의권 그리고 조세의 평등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법률적 평등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귀족주의 사회의 위계는 타협이나 양보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관점에서 탈선은 삼부회가 국회로 변모하는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국회는 왕이 임의로 소집하는 삼부회와는 차원이 다른 국민주권의 주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이 16세는 국회의 무력 해산을 계획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바스티유 사건(1789714)이 일어나자 반혁명주의자들의 망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반혁명 주의자들은 바스티유보다는 절대적 거부권과 양원제가 부결된 9월부터 혁명이 민주주의 쪽으로 탈선하기 시작했다고 간주하였다.

어쨌든 1789106일에 민중이 파리로 왕을 강제 귀환시킨 다음부터 반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반혁명은 왕이 처형(1793121)되기 전까지는 지지부진의 상태를 면치 못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 집결한 반혁명 귀족들은 유럽 군주들의 천대로 설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조국에서의 급격한 변화, 특히 장구한 전통(1790619일 귀족제 세습 폐지 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절망과 당혹감에 빠지게 되었다. 소위 음모론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태평 세대를 구가했던 구체제의 급작스러운 몰락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혼비백산한 그들은 계몽주의 철학자와 칼뱅주의자 그리고 프리메이슨이 작당하여 혁명을 음모했으며 그 증거는 자코뱅 클럽의 전국적인 조직망이라고 주장했다. 혁명이 진전하고 반혁명이 답보할수록 그들은 더욱 그러한 억설에 매달렸다. 그들이 그토록 소망하던 전쟁마저 17929월의 발미 전투 이후에는 전제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더구나 국민감정의 불길로 혁명은 한층 더 격렬해져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더니 드디어 왕마저 처형했다. 왕의 처형은 1792810일 그리고 공화국 수립의 논리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왕의 사망으로 반혁명이 완전히 실패하고 모든 희망이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에 반혁명 주의자들은 신의 섭리와 만나게 되었다. 혁명의 성공은 기나긴 세월 동안 축적되어 온 죄악의 속죄를 위해서 신이 강요한 시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 16세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속죄양인 동시에 구세주 즉 위대한 순교자인 셈이었다. 이렇게 반혁명은 왕의 순교를 계기로 노골적으로 신정론의 차원으로 승화하고 왕권과 교회가 일종의 신성동맹에 의해 굳게 뭉쳐서 19세기의 극단 정통파를 잉태하였다. 과연 신의 섭리대로 혁명과 반혁명의 싸움은 악마와 천사, 또는 악과 선의 싸움처럼 결국 후자의 승리(혁명의 상속자인 나폴레옹에 대한 유럽 반혁명 동맹군의 승리 그리고 왕정복고)로 마감됨으로써 신비주의와 신정론을 주장하는 극단파의 종말론적 역사관이 득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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