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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서산대사/사명대사와 임진왜란

by 영동신사 202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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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불교계 상황은 먼저 태조 때부터 도첩제를 시행하여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양반은 포 100, 서인은 150, 천민은 200필을 내야만 출가를 허락하는 강한 억제책으로 교단 운영의 기본 바탕이 되는 우수한 승려 자원이 크게 약화하였다. 이와 달리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불교 행사, 왕실의 제사, 사찰의 창건, 탑의 조성 등 불사는 지속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성립된 조선왕조는 고려시대에 광범한 영향력을 가졌던 불교를 강력히 억제하였고 이에 따라 불교 교단은 크게 위축되었다. 태종은 본격적인 불교 억제책을 펴서 1406년에 도문종 등 7242개만 지정하고 여타 사원과 승려, 사원에 소속된 토지를 줄이고자 하였다. 이듬해인 140788개로 축소하고 승려를 환속시켰으며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국사, 왕사 제도 및 왕릉에 사원을 세우는 것을 폐지하였다. 1424년 세종 6년에는 다시 7종을 선종과 교종 양종 체제로 축소하고 양종 36개 사원에 3,770명의 승려와 7,950결의 토지만을 인정하는 교단 억제 정책을 마무리하였다.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고 국가적 불사는 축소되어 왕실의 사사로운 불사로 바뀌었으나 대장경을 인쇄하고 석보상절 같은 불교 서적이 편찬되기도 하였다. 불교에 깊은 이해를 가졌던 세조는 사원을 중수하고 원각사를 창건하였으며 간경도감을 두어 불교 경전을 국역·간행하였다. 도승 제도를 일부 완화하였으며 3년마다 승과를 시행하여 선종과 교종 각 30명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하여 간경도감을 폐지하고 도승법도 폐지하였으며 도첩이 없는 자는 군정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 전기의 위축된 교단 상황으로 사원은 운영에 막대한 어려움을 겪게 되고 특히 우수한 인적 자원이 불교계에 유입되는 통로가 막힘으로써 승려들의 자질이 저하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신앙으로서 인식되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으로서의 불교는 왕실에서부터 완전히 사라질 수 없었다. 죽은 왕족을 위한 제례를 사원에서 지내고 대중 교화의 기능을 갖는 명부전의 시왕신앙이 효와 결부되어 사원 유지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신앙과 의례를 담당하던 사원의 역할이 사라지지 않음에 따라 서민들이 보다 가깝게 사원에 다가갈 수 있게 되고 최소한의 사원전은 유지될 수 있었다. 전기 불교를 대표하는 세종대의 함허기화(1376~1433)는 불교계의 정비를 도모하는 한편 현정론을 지어 인과법을 바탕으로 악을 끊고 선을 닦아 충효와 어긋나지 않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불교의 역할을 역설하였다. ··도 삼교의 본지가 동일하다는 삼교일치적인 관점을 토대로 유불의 상통성과 불법의 참모습을 말한 유석질의론도 이러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불교계 상황은 16세기에 들어서서 불교 교단 억제는 지속해서 시행되면서 명종 대에 일시적으로 제도적 부활이 이루어졌다. 이후 부분적으로 승려 층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지면서 불교 교단은 재활을 위해 노력하였다.

불교 교단은 성종 이후 사림세력들의 적극적인 비판으로 계속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시작된 16세기는 연산군의 억불 표방과 사원침탈로 더욱 형세가 위축되어 도첩제의 금지와 사사전의 폐지 등 제도적, 재정적 시책이 추진되었다. 사림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두드러졌던 중종 재임기 불교계에 대한 억제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억불 시책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어 왔던 왕실불교를 축소하기 위해 가신재를 철폐하는 것 이외에 경국대전의 도승 조를 삭제하여 제도적인 승려 배출을 차단하고 사원에 머무는 승려들에게 호패를 수여하는 대신 토목공사에 항시적으로 동원하는 제도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중종 후반에는 여지승람에 소재된 1,500여 개의 사찰 외에는 모든 사찰을 철폐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는 사찰의 남설을 방지하려는 시책이었지만 이는 동시에 이만큼의 사찰이 전국 각지에 남아 일반인들의 신앙을 보편적으로 담당해 갔음을 역설해 주기도 한다. 명종 대에는 문정왕후가 보우를 지원하여 불교 부흥을 추진함으로써 조선 초기 불교로 제도적 복원이 이루어졌다. 승과가 부활하고 도첩제가 시행되어 능력 있는 승려 배출이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배출된 인재들이 각지에서 수행에 진력함으로써 내적 역량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우의 선교 일치 및 삼교 화통의 사상 제창은 적극적인 불사와 함께 불교 부흥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불교 부흥 노력은 이후 불교계 약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배출된 인재를 대표하는 서산대사(휴정)와 사명대사(유정) 등은 선대의 계통을 확립하여 현 불교계 상황을 정립하고 여러 저술을 통해 내적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서산대사(휴정, 1520~1604)21세에 출가하여 부용영관에게 배우고 이곳저곳에서 정진하였다. 지리산, 오대산, 금강산 등에서 수련하였으며 33세인 1552(명종 7) 승과에 급제하였다. 38세에 승직을 벗어 던지고 금강산에 들어가 수행에만 열중하였다. 휴정은 50~60대까지의 시절을 태백산, 오대산, 금강산, 묘향산에서 수행에 진력하였다. 휴정은 후반 시기에 선대 전통의 확인을 위해 선대 고승들의 전기를 편찬하고 사상적 틀을 세워 수행에 열중하면서 제자들을 기르는데 진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활동을 통해 약 천 명의 문도들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도를 이끄는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국난을 헤쳐 나가는데 선진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73세의 고령에 접어들어 있었다. 사명대사(유정, 1544~1601)16세에 출가하여 18세인 1561(명종 16)에 승과에 급제하고 나서 많은 유학자와 교우하며 학문과 식견을 넓혔다. 유정은 시와 글에서 그들과 겨루어 뒤지지 않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1575(선조 8) 유정은 묘향산으로 휴정을 찾아가 사제의 관계를 맺고 선 수행에 열중한 다음 3년 뒤부터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명산대찰을 주유하며 심성을 연마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점사에서 승군을 모아 휴정 문하에 모인 다음 이들 전체를 통솔하는 도총섭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서산대사는 선교교와 염불을 포괄하는 사상 체계를 정립하고 유교와 도교가 불교와 근원이 다르지 않다는 삼교 의식으로 성리학이 완전한 체계를 세워 사회를 주도하던 상황 속에서 불교 교단을 일깨웠다. 이렇게 양성된 인재들이 임란에는 승병으로 활약하며 국가적 인정을 받게 되고, 16세기 말 이후 크게 성장한 승도 들의 외연과 어우러짐으로써 조선 후기 불교계가 이전에 비해 크게 신장할 수 있는 토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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