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청나라와 일본이 왜 우리 조선땅에서 전쟁을 했을까? class="layout-aside-right paging-number">
본문 바로가기
근현대사 주요 이슈

청일전쟁-청나라와 일본이 왜 우리 조선땅에서 전쟁을 했을까?

by 영동신사 2024. 2. 28.
반응형

1863년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극단적인 배외주의자였으며 기독교 탄압을 거듭하였다. 1866년에 프랑스인 선교사가 살해되자 프랑스는 이에 항의하고 원정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1871년에는 미국함대가 대동강에서 난파한 셔어먼호 승무원이 살해된 것(1866)에 항의하여 역시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미국은 이를 계기로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한편 메이지유신 후의 일본은 여러 차례 국교를 맺을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하게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치 실권은 왕비 민씨 일족이 장악하였다. 이듬해인 18749월 일본 해군 측량선 운양호가 강화도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았다. 운양호는 곧 반격, 상륙하여 포 38문을 포획하였다(강화도사건). 18762월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요점은 청나라 왕조의 종주권을 부인하는 자주국으로서의 조선 승인 양국은 사절을 상호 파견 부산 이외에 무역을 위한 2개 항 개항, 무역항에는 영사 주재 일본 영사는 형사사건에 대한 영사재판권 행사 등 이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조선에 개국을 인정시키고 나아가 청국·조선 관계를 분단하는 쐐기를 박았다. 한편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이 개국한 현실을 승인하고 조선과 열강의 조약체결을 촉진하였으며, 그 교섭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종속관계를 강화하고 일본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1883년 일본공사관의 무관을 교관으로 한 신식 군대가 편성됨으로써 실직한 병사나 급여가 나빠진 데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의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켰다(임오군란). 이 사건을 핑계로 일본 정부는 군함(4)과 운송선(3), 육군 병력 1개 대대를 인천에 파견하였다. 청국 역시 군함(7), 육군 2천여 명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사건이 수습된 이후에도 양국 군대는 그대로 조선에 주둔하였다.

1884124일에는 김옥균, 박영호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을 둘러싼 청·일 사이의 세력다툼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며, 양국은 교섭 끝에 천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천진 조약의 주된 내용은 양국 군대는 4개월 이내에 철수 양국은 조선에 군사교관을 파견하지 않음 장래 조선에 변란이 발생하여 청·일 양국 또는 1국이 파병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양국 모두 상대방의 승인 없이는 파병할 수 없으며 변란이 진정된 즉시 철병 등 이었다. 1884~1887년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 양국의 대립이 중심이 되고 영·러의 대립, 그리고 미국이 여기에 끼어들어 조선은 제국주의적 국제정치의 와중에 말려들어 갔다. 18943월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이 조선 정부에서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반청나라 기운을 비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즈음 조선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이 정치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은 18942월 전라도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으로 시작된 일련의 농민 대반란이었다. 18942월 광범한 농민이 봉기하고 동학의 지도자였던 전봉준은 각지의 동학에 격문을 보내 궐기를 추구하였다. 이리하여 순식간에 전라도 일대에 확대된 대반란으로 발전하였다. 동학농민군은 5월에는 조선의 발상지인 전북 전주를 점령하였다. 놀란 조선 정부는 63일 청국에 정식으로 출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청국은 육군 2,800여 명 조선에 출병하였다. 일본 역시 천진 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육군 4,000여 명을 증파하여 서울에 집중시켰다. 725일 일본함대는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청국 순양함·포함을 포격하고 수송선을 격침했다. 육상에서는 일본군이 경기도 성환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청국군을 공격하였다. ·해 방면의 충돌에 의해 청·일 사이의 전쟁은 기정사실로 되었다. 189481일 양국은 각각 선전 조칙을 발표하였다. 189495일 새벽부터 16일까지 평양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은 평양을 점령하였으며 청국은 조선 국내의 거점을 상실하였다. 다음날인 17일 서해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청국 함대는 거의 30%를 상실하고 남은 함대도 큰 피해를 보았다. 이후 청국 함대는 전의를 잃고 서해의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는 열강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청국이 45열 하여 기득권을 상실할 것을 우려한 킴벌리 영국 외상은 106일 독일·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미국에 청일 강화를 연합하여 권고할 것을 제의하고 열강에 의한 조선 독립의 보장, 청국의 일본에 대한 전비 배상 2항목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1895417일 전문 11조로 된 청일 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 랴오둥반도·타이완·팽호도 할양 군비배상금으로 2억 량(일화 3억 엔) 지급 청국·유럽 제국 간 조약을 기초로 청일통상조약 항해조약 및 육로교통무역에 관한 협정 체결 새로이 중경·소주·항주 등 개시·개항 개항장에서 각종 제조업 종사권 승인 비준 후 3개월 이내에 일본군은 철수하며 조약을 성실히 이해하는 담보로 웨이하이 점령 등 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돌려줄 것을 일본에 요구하였고(삼국간섭), 이를 일본이 수용함으로써 청일전쟁은 일단락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