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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조선의 개항과 역사적 의의

by 영동신사 2024.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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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산업자본이 독점자본으로 성장하면서 해외시장을 개척하고자 나선 서구 열강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1870년경 서구 열강들이 더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식민지 분할경쟁을 벌이면서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해외시장 개척의 손길이 동북아시아까지 닿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1850년대부터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베트남,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만드는데 집중하였다. 1819년 싱가포르를 식민지화한 영국은 말레시아, 버마를 식민지화하고, 1858년에는 인도를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1840~42년에 청과 아편전쟁을 벌여 청을 반식민지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미국, 프랑스도 청과 불평등조약을 맺어 치외법권을 인정받고 최혜국 대우를 보장받았다. 미국은 1854년 함대의 무력을 앞세워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뒤이어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처럼 중국대륙에 진출하였다. 러시아도 청의 혼란을 틈타 1857~58년 사이에 흑룡강과 연해주를 차지하였다. 청이 구미 열강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 그 위기감은 곧바로 이웃 나라인 조선에 미치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 해안에 이양선이 자주 나타났다. 이양선은 처음에는 식수나 식량을 구하러 접근하였지만 점차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의 본색을 드러냈다. 조선을 강제로 개방시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짠 일본은 18755월 부산항에 군함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이른바 운요호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구실로 1876227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강요하였고 민씨정권은 이에 굴복하고 말았다. 일본은 1860년대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천황제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와함께 화혼양재(일본정신과 서양기술)라는 슬로건 아래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식산흥업과 부국강병 정책을 펼쳐나갔다.

186811월 일본은 조선정부에 수교할 것을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강화도조약으로 불리는 1876227일의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서 치외법권인 영사재판권, 조계 설정, 무관세 무역, 일본화폐 유통허용 등 일본의 일방적인 특권을 규정하였다. 조선말기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으나 조선정부는 이러한 개혁과제를 추진하지 못했으며 개항과 개방에도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더구나 구미 자본주의국가로부터 받은 경제적 손실을 조선에서 보완하려던 청과 일본이 경제적, 군사적 측면에서 노골적인 침략성을 드러내자 조선은 더욱더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후 조선은 18825월에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829월에는 청나라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 1886년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구미 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었으며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개항과 함께 민씨정권의 부정부패와 청·일본의 경제침탈이 겹치면서 조선사회의 사회적 모순은 심화되었다.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김씨 등이 지배하던 세도정치기에는 과거시험장은 무법천지였으며 관직을 사고파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돈을 주고 지방관이 된 자들은 본전과 이자까지 뽑고자 혈안이 되었다. 권세있는 양반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세금을 내지않았다. 그 만큼 힘없는 농민들이 내야할 몫은 많아지게 되었다. 원래 가난한 농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실시되던 환곡도 관청고리대로 바뀌어 농민들을 압박하였다. 특히 관청에서는 모자라는 재정을 환곡으로 보충하였기에 농민들은 이 환곡을 가장 많이 원망하였다. 관에서는 농민들이 바라지도 않는데도 환곡을 나누어 주고 높은 이자는 받아가는 방식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또한 일반농민이 군대에 가는 대신 내던 군포도 공평하지 않았다. 양반들은 군역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돈은 주고 양반이 된 사람들은 군역에서 빠져나갔다. 모자라는 군역은 농민들의 부담이 되어 한 사람이 몇 사람의 몫을 맡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날로 늘어나는 정부의 수탈에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이들의 움직임은 점차 봉건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식량인 쌀을 수출하고 자본제 상폼인 무명을 수입하는 미면교환체제라 불리는 식민지 무역관행이 생겨나게 되었다. 일본으로의 쌀 수출이 늘어나면서 국내 쌀값은 치솟고 민중들은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외국산 면제품의 유입은 공장제 수공업 단계로 들어서고 있던 조선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외국 상인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일본 상인들은 농촌에 침투하여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입도선매 방식으로 미리 사버렸다. 부족한 농사 자금을 채우고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서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돈을 받아서 써야만 했다. 가을이 되어 일본 상인들이 수확한 벼를 모두 거두어 갈 때면 조선의 농민들은 빈털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겨울과 봄을 넘기기 위해 비싼 고리대를 써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조선의 농민들은 파산하게 되었다. 또한 대량생산된 값싼 면직물이 조선 농촌사회에 밀려들자 가내부업으로 전통적 면직물을 만들어 팔던 농민들은 몰락하였고, 면화를 재배하던 농민들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농민들의 외세에 대한 경계심과 적대의식이 쌓여갔다. 또한 개항장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는 일본 상인들의 상권침탈과 불법행위를 규탄하는 조선 상인들의 외침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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