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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에서 문화라는 말은 언제부터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by 영동신사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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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라고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게 한국문화, 전통문화라고 할 때의 문화이다. 이때의 문화는 한 인간집단의 생활양식 총체를 뜻한다. 문화에 대한 이런 이해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인류학자 테일러가 내린 문화는 지식·신앙·법률·도덕·관습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얻어진 다른 모든 능력이 습성의 복합적 총체라는 정의에서 유래한다. 이 정의는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포괄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어 컬쳐(Culture) 즉 문화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을까? 그 처음이 언제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개항기를 전후한 시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발행된 황성신문을 보면, 문화라는 말이 몇 군데 띈다. 문화라는 말이 쓰인 맥락을 살펴보면 이때 말하는 문화는 문명(Civilization)에 가깝다. 당시 지식인들은 문화를 문명개화라고 불렀다. 문명개화를 문화로 받아들이는 인식은 1920년에도 이어졌다. ‘근래 우리 조선 사회에서도 문화생활이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이는 반드시 근대문명이라는 과학 정신의 세례를 받은 후라고 하듯이 문화생활의 문화란 과학으로 대변되는 근대문명의 근간이 되는 그런 문화였다. 그 문명의 도래처는 서양이었다. 현재로서는 전 세계의 인류가 모두 한가지로 따르는 목표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였다. 상식도 과학적 상식만이 평가되었다. 문화가 자리 잡으려면 문명이 선행해야 했는데, 이런 근대문명이 자리 잡는 것을 근대화라 하고 그것은 다시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문화는 그 개념이나 용어 자체가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은 산업혁명기 영어권에서 형성되었다. 문화라는 말은 산업화·도시화, 노동계급의 형성과 궤를 같이하면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문화의 대중성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런 대중성을 문화에 받아들여 문화주의의 체계를 정립한 사람이 윌리엄스이다. 이전에는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만을 문화로 보았다. 이는 곧 엘리트 문화만이 문화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일상생활의 텍스트 및 실천 행위들과 교류하는 데서 만들어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 있는 경험을 문화라고 정의하였다. 즉 문화를 삶의 총체적 방식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화주의에서 문화는 적어도 엘리트 문화를 넘어선다. 그리고 대중문화를, 나아가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된다. 대중문화도 고급문화와 동등한 문화라는 인식이 나타났고, 이는 문화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범주의 문화라는 말이 등장한 시기는 대략 1920년대 초로 보인다. 1920년 한 지식인은 문화주의를 문화로써 생활의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문화는 인격 있는 사람으로 여러 가지 자유롭게 발전하게 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런 정의에서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가 인격이 있는 이상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질 만한 자이며 따라서 이른바 인격이란 사람들이 문화에 대하여 참여할 자격으로 정한 것이니 사람들은 이른바 그 자격에 하등의 차별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 인격을 두루 갖춘 이상 누구든지 동일한 평등의 자리에 설 것이라고 하였다. 즉 문화라는 말은 인격적 평등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주는 언술이 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래서 이 시대를 민중 시대라고도 불렀다.

1920년대 들어 문화주의와 함께 문화운동도 일어났다. 이 문화운동은 1920년대를 맞아 새롭게 전개되었다. 문화운동의 가시적인 목표는 조선 민중의 실생활 조건을 향상하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 급한 것은 조선인 자체의 생산력 발전을 기도하는 것이었다. 물산장려운동 등은 바로 그런 목적을 갖는 생산력 양성 운동이었다. 생산력 양성이란 다름 아닌 실력양성이었다. 따라서 문화주의가 추동한 문화운동은 당연히 실력양성으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문화를 둘러싼 갈등도 나타났다. 컬트를 교화라는 말로 옮기면서 부르주아 컬트=지배계급 교화=유산계급 교화, 프롤레타리아 컬트=피지배계급 교화=무산계급 교화라고 나누어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시 문화의 이해에는 이미 계급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이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통치 방식을 문화정치란 말로 포장했다. 문화정치의 문화는 다분히 문치 교화의 의미를 지닌다. 그들 스스로 1910년대의 통치 방식을 무단통치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떠 올리면 왜 문화정치의 문화가 문치 교화를 뜻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정치의 문화는 곧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문화주의의 문화는 당연히 부르주아 컬트였다. 문화정치는 이런 문화의 계급성과 결합되어 있었다.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는 식민지였다. 민족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 상황이었다. 그래서 문화에는 계급성만이 아니라 민족문제도 덧씌워졌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의 내용은 더 복잡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30년대 식민지 조선 사회는 대중문화의 시대를 맞았다. 신파극· 대중가요·영화의 3대 장르가 주도하는 대중문화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대중문화는 근대화에서 비롯되는 비인간적인 소외와 더불어 식민지라는 억압 도구가 빚은 정서와 섞이면서 독특한 문화양상을 낳았다. 그런 대중의 정서는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모던 보이, 모던 걸과 같이 낭만주의적 퇴행성을 보이는 식민지적 근대성이고 다른 하나는 신파적 비극미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후자가 더 특징적이었다. 신파적 비극미란 현실의 타율적 힘에 체념과 인종으로 순응해야만 하는 이율배반에서 나오는 자학적 죄의식의 표출을 말한다. 이런 신파적 비극미는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 등 신파극을 통해 식민지 대중을 사로잡았다. 신파극은 대중의 무기력증을 조장하고 재생산 해냈다. 신파에서 짜내는 눈물은 위안을 해주었다. 그러나 눈물 젖은 눈은 현실을 외면할 수 있는 적당한 핑계가 되었다. 따라서 신파극은 체제 순응적 저급문화를 양산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신파극은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들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이런 왜곡된 대중들의 정서는 문화주의가 걸었던 길과 무관하지 않았다. 문화주의=실력양성론은 점차 체제 순응적으로 되어 갔다. 문화에서는 부르주아 컬트가 주도하면서 역시 그런 변화에 기여하였다. 이 시기의 문화운동 내지 문화주의는 다분히 타협적 속성을 노출했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와 대립하였다. 1923~24년에는 이런 대립이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당시의 운동을 크게 독립운동, 문화운동, 사회운동의 셋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문화운동 그룹은 토산을 장려한다고 하여 유산계급과 더불어 손을 잡았고, 교육을 보급한다고 하여 자유주의자와 연합하였으며, 인권 확장을 빌미로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협력하는 등 이들은 점차 일제에 타협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문화주의 내지 문화운동이 이렇게 변화는 사이 대중들의 문화라고 변하지 않을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대중들의 가슴 속에 신파적 비극미가 자리 잡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대중문화의 왜곡은 바로 문화주의가 간 길이기도 하였다. 식민지에서 맞은 우리의 근대, 거기서 성장한 우리의 대중문화는 단지 산업화·도시화라는 변수에만 반응해야 했던 서구의 대중문화와는 성장한 틀 자체가 달랐다. 이런 대중문화의 틀은 해방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식민지 권력을 대신한 군사독재정권이 그런 특징을 유지하게 하는 압력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대중문화의 분석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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