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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주요 이슈

한국 근대초기 지방행정구역의 원형

by 영동신사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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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지방 행정구역의 원형은 1914년에 만들어졌다. 1914년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은 부제의 시행, ·면의 통폐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때 이루어진 지방 행정구역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 지방 행정구역의 골격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일제는 이미 1895년에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자행한 뒤 수립한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통해 지방제도 개편을 기도하였으나 아관파천으로 실패하였다.

 

다시 1906년 통감부를 통해 지방 행정구역 개편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1906년 다시 대한제국 내부에서는 지방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13도를 존속시키고 342개 군 가운데 50개 군을 통폐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센 반대론과 지방민들의 반발로 결국 대대적인 군 통폐합 계획은 철회되었다. 1906924일 칙령으로 1수부, 13, 1, 3, 339군을 1수부, 13, 11, 332군으로 변경하는 조치가 101일부로 시행되었다. 그 후 약간의 군 통폐합이 진행되어 1910년 합병 당시에는 317개 군으로 감소하였으며 합병 직후에도 소폭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실시되었다.

 

191441일부로 시행된 부제는 12개의 부를 그대로 존속시키되 부의 영역을 축소하여 형식상 지자체를 표방안 공법인으로 만든 조치였다. 또한 31일과 41일에 각각 시행된 군 및 면의 통폐합 조치는 종전 317개 군에서 97개 군을 감축하여 220개 군으로, 종전 4,332면에서 1,800개 면을 줄여서 2,522면으로 감축하였다. 부군 폐합의 발표일은 오락가락했다. 먼저 부군 통폐합 준비를 마친 뒤 1913124일경 조선총독부로부터 각 도에 그 준비에 대한 훈령을 내리고 24일경 발표할 계획이었으나, 1220일경으로 앞당겨졌다가 연막전술로 이듬해 봄으로 늦추었다. 그 후 언제라도 발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여 반응을 살핀 다음 바로 이튿날 전격적으로 발표하였다.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것으로 조선인의 반발을 고려한 조치였다. 지방 행정구역 개편 방침은 19131월 각 도 내무부장 회의에서 조선 총독의 지시로 추진되었다.

부제는 지방 행정구역 정리의 추진과 함께 종래의 거류지 제도 및 거류민단 제도를 철폐하고 외국 거류지는 모두 이를 지방 행정구역인 부에 편입하는 조치였다. 따라서 종래 일반 지방행정과는 별도로 그 구역 내의 공공사무를 취급했던 각국 거류지회·거류민단 및 한성위생회를 폐지하고, 그 사무 가운데 일본인의 교육에 관한 것은 학교 조합에, 기타 업무는 행정사무와 함께 부에 인계한 것이다. 부제는 종전의 부의 이름과 개수는 그대로 유지하되, 형식이나마 자치제를 표방한 것으로 12개 부 가운데 11개 부가 일본인 거류민단 소재지였다. 부제의 실시와 함께 일본인 거류민단과 외국 공동조계·한성위생회 등이 철폐되었다. 이들의 업무와 권리·의무를 부가 승계하면서 교육에 관한 것만 학교 조합에 넘겨주었다.

 

이때 거류민단이 지고 있던 막대한 부채가 부에 그대로 승계되었고, 이는 부내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그 부담이 전가된 것이었다. 또한 부에 설치된 부 협의원에는 조선인 협의원들도 임명되었지만 모두 대한제국의 관리, 실업계 인사, 지주들로 친일 세력 일색이었다. 과거에는 일본인 거류민단에서 일본이 민단 회원들로부터 경비를 모금하여 그들의 경비로 지출하였는데, 거류민단의 업무가 부로 넘어가고 그 업무를 위한 경비를 부내에 거주하는 모든 거주민에게 세금으로 징수하게 됨으로써 조선인들과는 관계없는 업무의 경비를 위해 조선인들이 세금을 납부하게 된 것이 부제 실시의 본질이었다.

종전 부의 구역에 속하던 농촌의 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새로 군을 설립하고 317개 군을 220개 줄이는 군의 통폐합 조치도 191431일부터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군수 및 군 참사·군서기 등의 정원이 줄어들게 되었다. 자리에서 물러난 군수를 위해서는 500원씩의 특별급여가 지급되었는데, 그것만도 5만원이란 거금이었다. 또한 새로 군수로 임명된 사람은 7명이었는데, 모두 도··군 서기 출신이었다. 군의 통폐합에 적용된 기준은 면적 약 40방리, 가구 수 1만호였다. 그 결과 군 통폐합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 구역 그대로 유지된 곳도 69개 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도 면제 시행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일 뿐이었다. 군 통폐합할 때의 경계 정리 방침은 면의 통폐합에도 적용되었다. 면의 통폐합에 따라 전체 4,337개 면이 2,522개 면으로 정리되었다. 이와 함께 면장의 교체도 광범위하게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경기도에서는 1년 전에 새로 면장이 임명된 사람의 5분의 1만이 유임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면 폐합의 결과 면적과 호수에서 면별 격차가 많이 줄어 들었고, 면의 평균 지세액도 증가하였는데, 일제는 이를 두고 면 재정의 안정화라고 선전하였다. 이는 일제가 조선의 민중과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말단 행정기관인 면의 행정력을 장악하고자 기울인 노력의 결과였다.

 

이 시기의 면 통폐합에 따른 면 호구 및 재정의 평준화 제고, 이어서 1917년 면제의 실시로 완비되는 면제의 본질은 일제가 지방 지배를 위한 일선 지방 행정단위로 종전의 군 대신 면을 선택했다는 점에 있는데, 군 대신 면을 중시했던 관행은 해방 후에도 비판 없이 답습되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실시된 지방 자치제에서 군이 배제되었다. 면의 통폐합을 완료한 일제는 이어서 동과 리의 정리에 착수하여 토지조사사업이 종료되는 1918년까지 종료하였다. 그에 따라 조선 전래의 기층 자치 조직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로써 일제는 조선의 지방행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식민 통치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최재성의 글 1914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과 그 성격을 발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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